설핏 가을을 본 것 같아.
사물은 본래 고정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책은 책장에, 의자는 바닥에, 신발은 현관에.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비틀면 사물들은 허공을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질서를 확립한다. 떨어진 연필 한 자루는 단순히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마찰, 빛의 각도와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미세한 서사를 구축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며 허공을 걸어간다.
사물의 습관이란 결국 인간이 부여한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은밀한 기질이다. 예를 들어 오래된 가방을 열면, 주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영수증이나 종잇조각이 흩날린다. 그것들은 애초에 버려졌어야 했지만, 사물의 은밀한 습관이 그들을 붙잡아 허공에 남겨둔 것이다. 가방 속에서 수년간 맴돌던 종이는 이미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것을 꺼내는 순간, 종이는 다시 허공을 걸으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간다. 사물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결코 정지하지 않는다.
방 안의 의자는 어제도 오늘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표면을 더듬어보면 앉은 이의 체중이 남긴 미세한 흔적이 촘촘히 겹쳐 있다. 의자의 목재는 그 무게를 흡수하며 천천히 변형되고, 마치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기억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허공을 이동하는 중이다. 의자는 매일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사물은 인간보다 훨씬 끈질기게 허공을 걸어간다.
가득 꽂힌 책들은 단정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매일 조금씩 기울고, 빛과 습기를 머금으며 변색한다. 오래된 책의 페이지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스스로 미세하게 흔들린다. 종이는 공기 중의 습도에 따라 팽창하거나 수축하며 허공과 대화한다. 책은 단순히 지식을 담은 그릇이 아니라, 허공을 건너가는 사물의 전형이다. 손길이 닿지 않아도 책은 서서히 걸어간다. 종이의 섬유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길이 숨어 있고, 활자 사이에는 아직 걷지 못한 허공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거울은 단지 모습을 반사하는 표면이 아니다. 거울은 하루에도 수십 번 허공을 가로지른다. 시선을 받은 순간, 거울은 그 시선을 반사하여 또 다른 공간으로 건넌다. 거울의 표면에 맺힌 모든 시선은 허공을 건너 이동하고, 사라졌다가도 때로는 꿈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거울은 자신이 품은 이미지들의 습관을 안쪽 깊숙이 저장한다. 그리고 어느 날, 오래된 거울 앞에 서면 낯선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은 과거에 머무르던 시선이 허공을 걸어온 흔적이다.
사물의 습관은 늘 은밀하게 작동한다. 방의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동전 하나는, 자리를 바꾸지 않는 듯 보이지만 빛의 각도와 그림자의 이동 속에서 매 순간 다른 위치에 놓인다. 햇살이 스치면 동전의 반짝임은 허공을 흘러가고, 그 흔적은 기억 속에 남는다. 허공을 걷는다는 것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태도다. 사물은 언제나 자신의 습관을 통해 고정과 이동 사이를 오가며, 보이지 않는 발걸음을 기록한다.
그 습관의 정점은 시간이다. 오래된 시계는 초침이 돌아가는 단순한 장치 같지만, 그 바늘은 사실 허공을 끊임없이 가른다. 초침이 지나간 자리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장소가 된다. 시계는 시간을 잰다기보다, 허공 위에 발자국을 새긴다. 그 발자국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물의 습관을 묶어내는 거대한 무늬다.
허공을 걸어가는 사물의 습관은 결국 인간의 삶과도 닮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사물을 사용하는 주체라 믿지만, 사실은 사물의 궤도 안에 갇혀 있다. 매일 사용하는 컵, 매일 여닫는 문, 매일 눕는 침대는 사람의 움직임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습관을 강화한다. 컵은 물을 담아내는 순간마다 허공을 걸어가며, 손의 온도를 기억한다. 문은 열리고 닫히며 그 경첩 속에서 수많은 허공의 소리를 축적한다. 침대는 눕는 몸의 습관을 학습하며, 매일 조금씩 다른 꿈의 궤적을 품는다. 결국 인간은 사물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습관 속에서 길들여진다.
허공을 걷는 사물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은밀하게 흔적을 남기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시 제자리에 있는 척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사물은 언제나 걸어가고 있으며, 그 걸음은 허공 속에서 하나의 언어가 된다. 책의 낡은 모서리, 의자의 미세한 기울기, 거울에 남은 그림자, 시계가 새기는 초침의 흔적. 그것들은 모두 사물이 허공을 걸어가는 방식을 드러낸다.
사물의 습관이란 존재의 고집스러운 태도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도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은밀한 전략. 고정된 듯 보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모순. 허공을 걸어가는 사물의 습관은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의 리듬을 드러낸다. 그것은 고요하지만.
누구보다도 분명한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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