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준비한 깜짝 파티
가만히 앉아 있던 자리에 몸을 떼는 순간, 바닥에 쌓여 있던 미세한 흙먼지가 곤두서듯 피어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작은 먼지들은 빛을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서 반짝였다. 오래 앉아 있던 자리일수록 먼지는 더 요란하게 춤을 췄다. 먼지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침전물처럼 숨어 있다가,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불현듯 존재를 드러낸다.
먼지가 일어나는 장면에는 은근한 유쾌함이 있다. 뭔가 대단한 사건은 아닌데도, 갑자기 예고 없이 무대 위로 튀어나오는 코미디 배우처럼 웃음을 자아낸다. 평소엔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것들이 ‘나도 여기 있었다’며 자랑하듯 발광하는 순간. 먼지는 떠들썩하게 깃발을 흔들며 작은 공연을 펼친다. 그 공연의 주인공은 결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그저 촉발자에 불과하다. 주연은 흙먼지, 조연은 빛, 무대는 허공이다.
아무리 부드러운 의자나 고급스러운 소파라도, 오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작은 입자들은 꼬리를 감추지 못한다. 심지어 카페 구석의 빈 의자에서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털고 일어날 때도, 혹은 오래된 서재의 퀴퀴한 의자에서도, 먼지는 공평하게 출현한다. 먼지는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는다. 애써 감추려 해도, 결국은 드러내고야 마는 세상의 어떤 진실처럼.
특히 여름 오후, 강렬한 햇살이 창문을 가르며 들어올 때, 먼지는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는다. 빛을 통과하며 반짝이는 모습은, 오히려 먼지가 아니라 작은 별처럼 보인다. 우주의 미니어처가 카페 테이블 위에서 재현되는 셈이다. 먼지가 일어날 때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시간이 길었음을, 그리고 시간이 그 자리에 흔적을 남겼음을 알게 된다.
먼지는 게으른 존재다. 청소기를 피해 구석에 숨고, 손길이 닿지 않는 틈새에 웅크린다. 그러다 누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난다. 생동감 넘치는 부활의 순간은 그야말로 의외성의 미학이다. 먼지가 없다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단순한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먼지가 개입하는 순간, 사소한 동작도 작은 서사로 변모한다.
어쩌면 먼지는 인간의 무심함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그 무심함이 불쑥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누구도 먼지를 모아두려 하지 않지만, 먼지는 끝내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허공에서 빛을 머금고 잠시 반짝인 후, 곧 다시 땅으로 내려앉는다. 흙먼지는 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때때로 먼지의 움직임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뛰놀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모래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날 때마다 바람처럼 흙먼지가 일었고, 친구들은 그 흙먼지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쫓아다녔다. 먼지는 짧은 순간 눈앞을 가렸지만, 그 안에서도 웃음소리는 여전히 분명했다. 먼지는 불편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놀이의 일부였다.
비슷한 풍경은 장례식장에서도 목격된다. 까만 양복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킬 때, 보이지 않던 작은 입자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 흙먼지는 슬픔과 의식의 무게 속에서도 조용히 날아올라 빛을 반사한다.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장소에서조차 먼지는 일관되게 같은 방식으로 반짝인다. 흙먼지에게는 슬픔도, 기쁨도 없다. 오직 반짝임과 가라앉음, 이 두 가지 리듬만 존재한다.
도시의 오래된 영화관에 가면, 스크린 앞을 가로지르는 먼지들을 볼 수 있다. 영사기의 빛줄기를 타고 무수히 떠다니는 입자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다.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흩날리는 그 작은 입자들은, 누군가의 오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이미 떠오른 것들일지도 모른다. 영화관은 흙먼지들의 거대한 무대다. 아무도 박수 치지 않지만, 그들은 매일 묵묵히 공연을 이어간다.
모든 문장은, 결국 사람이 남긴 흔적의 선언이기도 하다. 오래 앉아 있던 시간, 땀과 체온, 작은 호흡이 모두 그 자리에 스며든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흙먼지가 그것을 대변한다. 일어난 순간, 그 흔적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다시 내려앉아, 또 다른 시간의 침전물이 된다.
먼지는 마치 파티에서 늦게 등장하는 손님 같다. 음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뒤늦게 도착해 무대를 장악하는 이들.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한바탕 춤을 추지만, 누구도 그들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티가 끝나고 나면, 그 짧은 반짝임이 은근히 떠오르기도 한다.
일어서는 행위는 늘 무언가를 끝내는 동시에 새로 시작하는 징후다. 흙먼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잘 있었다" 혹은 "이제 가도 된다"고 말하는 작은 제스처처럼. 흙먼지가 일어난 자리에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앉아 있지 않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그 자리를 과거로 만드는 행위다.
먼지는 유쾌한 증인이다. 매번 일어날 때마다, 조용히 눈앞에서 반짝이며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먼지는 고요하지만, 언제나 타이밍을 정확히 맞춘다. 과거와 현재 사이, 앉음과 일어섬 사이, 그 짧은 경계에서 흙먼지는 기어코 존재를 드러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흙먼지가 일었다. 그 순간 흙먼지는 고요한 축포였고, 가볍게 흔드는 손수건이었으며, 사라지는 인사였다. 먼지는 결국 다시 가라앉지만, 그 반짝임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유쾌하게 남아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