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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사이

가을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by 적적


가을은 중간의 계절이다. 끝과 시작 사이, 무너짐과 기다림 사이에서 서성이는 중간의 계절. 달력의 종이는 아직 두 장이나 남아 있지만, 창가에 매달린 햇빛은 이미 어제와 다르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허공의 먼지를 갈라놓으며 들어오고, 나뭇잎은 스스로 몸을 떨구어 땅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 계절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떨어진다. 낙엽, 낙과, 심지어 오래된 기억까지. 떨어지는 것은 가볍지만, 떨어진 자리에 남는 공백은 묵직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발목 근처를 스쳐가는 공기에는 철 지난 꽃의 향기와 말라붙은 흙냄새가 섞여 있다. 흙은 지난 계절의 물기를 다 짜내고서도 여전히 냉정하다. 흙냄새 속에는 여름의 마지막 땀방울이 아직 섞여 있다. 그것은 끝내 증발하지 못한 한 방울의 슬픔처럼, 서늘한 바람 속에서 묵묵히 남아 있다.



가을의 중간에는 시간이 멈춘 듯 흘러간다. 시계는 정상적으로 움직이지만, 몸은 더디게 반응한다. 발걸음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묘한 공통점이 생긴다. 여름의 광택은 사라졌고, 겨울의 긴장감은 아직 오지 않았다. 미묘하게 비어 있는 눈빛. 그것은 기다리는 얼굴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길어진 그림자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노인의 신발에는 가을의 먼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먼지는 무게가 없지만, 그것이 쌓여 있는 신발은 마치 오랜 시간을 들여 이 계절을 버텨왔다는 표식 같았다. 신발 끝에 묻은 흙이 흘러내리지 않고 고여 있는 모습은, 계절이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을 닮았다. 정류장 위 시계는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태양은 이미 그보다 한 시간쯤 더 늦게 기울어 있었다. 계절의 시계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계보다 앞서거나 늦다.


가로수 아래를 지나는 아이는 바닥에 흩어진 낙엽을 일부러 밟으며 걷고 있었다. 낙엽은 종이처럼 얇은 비명을 지르며 부서졌다. 아이의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그 소리는 사라진 계절의 울음 같았다. 아이는 그것을 즐기듯, 또 한 번 발을 내리꽂았다. 부서지는 소리 위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웃음과 파괴가 뒤섞여 흩어지는 순간, 가을의 공기는 잠시 투명해졌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계절을 중계하고 있었다. 잡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오늘의 날씨와 내일의 기온, 그리고 기약 없는 미래를 예보했다.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건조하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미 겨울의 음색을 닮아 있었다. 현악기의 떨림 속에서 알 수 없는 추위가 새어 나왔다. 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도시의 공원 한쪽에서는 개가 줄에 묶인 채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개의 눈동자는 알 수 없는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보는 눈빛 같았다. 개는 짧게 짖지도, 길게 울지도 않았다. 단지 고개를 기울이며 바람 냄새를 맡았다. 바람은 개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개는 그 말을 알아듣는 듯 고개를 살짝 떨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개와 바람 사이에서는 이미 다른 계절의 약속이 오가고 있었다.



어느 오후, 도서관의 창문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은 낯설게 떨리고 있었다. 책 속의 문장은 계절과 상관없이 고정되어 있지만, 읽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계절이 묻어 있었다. 문장을 따라가던 눈빛이 어느 순간 허공으로 흘러가 버리는 순간, 그것은 곧 계절의 중간에서 길을 잃은 눈빛이 된다. 책은 닫히지 않았지만, 문장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읽는다는 행위조차 가을의 중간에서는 잠시 멈춘다.



저녁 무렵, 강가의 물결은 잔잔했으나 이상하게도 물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 위로 비친 하늘은 붉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중간의 빛. 그것은 붉음과 푸름이 서로 섞이며 타협한 색깔이었다. 그 타협 속에서 강물은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물새 한 마리가 강 위로 낮게 날았다. 날갯짓은 가볍지만, 날개 끝이 물결을 스치자 물은 둔탁하게 울렸다. 울림은 잠시 번졌다가 곧 사라졌다. 가을의 시간도 그렇게 번졌다가 사라진다.


도시는 점점 불빛을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불빛마저 완전하지 않았다. 여름의 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겨울의 불빛은 단단히 붙잡아두려 하지만, 가을의 불빛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그것은 잠시 머무는 불빛, 언제든 꺼질 수 있는 불빛이었다. 건물의 창문마다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이 마치 불완전한 심장처럼 깜빡였다. 불빛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은 묘하게 흔들렸다. 불안과 기대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눈빛.



밤이 내려오면 가을의 중간은 더욱 선명해진다. 공기의 밀도가 바뀌고, 어둠이 촘촘히 깔린다. 사람들은 이 어둠 속에서 더욱 자신을 잃는다. 길모퉁이에서 서성이는 그림자는 주인을 닮았지만, 주인보다 더 낯설다. 그림자는 계절을 먼저 건너가는 존재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림자는 이미 다음 계절로 넘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몸은 여전히 가을의 공기 속에 있지만, 그림자는 다른 계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겨울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지나간 여름을 붙잡고 있느냐. 그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저 중간에 서 있을 뿐이다. 기다림이라는 단어조차 이 계절에서는 모호하다. 기다린다는 것은 방향을 전제하지만, 가을의 중간에는 방향이 없다. 오직 멈춤과 흔들림만이 있다.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는 그 순간이야말로 가을의 본질이다. 이미 떨어질 운명임을 알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상태. 그 미묘한 중간. 잎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떨어지려는 필연 사이에서 진동한다. 사람의 감정도 그와 다르지 않다. 끝날 것을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고, 시작할 수 있으면서도 시작하지 못하는 감정. 가을은 그 감정의 계절이다.



아스팔트 위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조차 묘하게 낮아져 있다. 여름에는 날카롭게 쏟아지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울리지만, 가을의 자동차 소리는 중간에서 가라앉는다. 그것은 마치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울음 같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익숙해지면서도, 어쩐지 낯설다고 느낀다.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 계절은 더욱 진해진다.



벽시계의 초침은 분명히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앞으로의 시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겨울인가, 다시 돌아올 봄인가. 초침이 가리키는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그 끝이 어떤 계절인지 알 수 없다. 가을의 중간은 그렇게 불확실하다. 불확실하기에, 오히려 확실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불확실 속에서만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이 계절의 밤하늘은 별이 적다. 별빛은 이미 다른 계절로 이주한 듯 보인다. 희미하게 남은 별 몇 개만이 검은 하늘 위에 흩어져 있다. 별은 빛나지만, 그 빛은 충분히 멀어서 아무 힘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빛은 계절의 공백을 드러내는 데 더 충실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개는 묘하게 무거워지고, 내려다보는 발끝은 이상하게 가벼워진다. 고개와 발끝 사이에서 몸은 중간의 무게를 버틴다.



가을 중입니다. 이제 어떤 계절을 기다리죠.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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