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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던 자리, 바람만 남아.

그대 가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by 적적

도시의 끝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매년 10월이면 금빛으로 변하는 잎사귀들이 도로를 뒤덮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금빛 먼지가 흩날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가리켜 ‘가을의 표식’이라 불렀다. 그곳을 지나는 누구라도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무언가 잊어버린 기억을 더듬듯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이는 없었다. 마치 그 나무 아래에는 잠시만 서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규칙이 있는 것처럼.


그곳에 다시 나타난 사람은, 한때 그 나무를 함께 바라보던 여자를 잃은 남자였다. 그들은 가을의 시작과 함께 만나, 가을의 끝에서 헤어졌다. 모든 계절이 그렇게 짧게 지나가듯, 그들의 사랑도 계절만큼의 시간을 허락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 계절에 갇혀 있었다. 달력이 바뀌고 해마다 같은 은행잎이 떨어져도, 그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남자는 그날의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행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던 소리, 여자가 입고 있던 낡은 카디건의 질감, 미묘하게 짙어지던 하늘의 빛. 그리고 마지막 인사처럼 던져진 말 한마디.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그 문장은 예언이 되었고, 저주가 되었다.


남자는 그날 이후로 모든 가을이 그 여자에게로 이어지는 문이 될까 두려워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는 고개를 숙였고, 첫 번째 바람이 불면 창문을 닫았다. 어느 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잠시 잊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계절은 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 도시를 떠나 있었다.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눈이 깊게 내리는 북쪽으로. 그곳들엔 가을이 없었다. 계절은 한없이 길거나, 너무 짧아 알아차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해 10월, 그는 다시 그 도시로 돌아왔다. 출장이라는 핑계였지만, 그것은 오래된 약속의 부름에 더 가까웠다.



그가 택시 창밖으로 본 도시는 많이 변해 있었다. 신축 건물이 세워지고, 오래된 카페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은행나무만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보호수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고, 나무 주위를 감싸는 펜스가 생겨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나무에 손을 대거나 가까이 다가설 수는 없었다.



그는 펜스 바깥에서 한참 동안 나무를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다시 만난 사람처럼. 바람이 불자 잎사귀 몇 개가 펜스 안쪽에서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중 하나가 그의 신발 위에 떨어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 잎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가볍고, 손끝에서 쉽게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이미 가을의 바깥에 있었다.



기억은 종종 계절의 형태로 남는다. 봄의 냄새는 한 사람의 웃음으로, 여름의 빛은 누군가의 어깨 위로. 그리고 가을의 바람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뒷모습으로. 남자는 그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사랑이란 결국 계절을 소유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계절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계절은 언제나 지나가고, 사람은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모텔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커튼을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 사이로 은행잎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방 안에서 잎은 천천히 떨어져 바닥에 닿았다. 그는 잠시 그 잎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했다.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밤이 깊어지자 도시는 조용해졌다. 거리의 불빛들이 꺼지고, 남자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때 여자가 말했던 문장이 머릿속에서 다시 울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그 문장은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고, 동시에 위로였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건, 그때의 자신으로 다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떠난 뒤 몇 번의 겨울을 지나며 다른 사람의 곁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소식을 우연히 들었을 때,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는 것처럼, 그저 끝나버린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여전히 그 계절을 걷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그때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은 종종 현실보다 느리게 계절을 바꾼다. 세상은 이미 다음 해로 넘어갔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이전의 시간에 머문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한 계절 속에서 살아간다. 여름에 태어나 여름의 빛 속에서 늙어가거나, 가을에 사랑을 잃고 가을의 냄새 속에서 늙어간다.



남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돌아간다는 것은 같은 상처를 반복해서 입는 일이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그 상처가 결국 시간 속에서 낫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그 나무 앞에 섰다. 아침 햇살이 나무의 금빛 잎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펜스 너머로 나무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잎사귀를 펜스 안쪽으로 던졌다. 잎은 잠시 공중을 맴돌다, 다른 잎들과 함께 나무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어 그가 지나간 길 뒤로 노란 잎들이 흩날렸다. 그 순간, 이상할 만큼 마음이 고요해졌다. 마치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는 알았다. 그 계절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자신은 이제 그 계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절은 언제나 반복되지만, 그 속의 사람은 반복되지 않는다. 시간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그 제자리에서 멈춰 서 있을 뿐이다.



도시의 오후가 깊어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이들은 커피를 들고, 어떤 이들은 전화를 받으며. 그 누구도 하늘의 색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은행나무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별을 목격해 온 존재처럼.



가을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찾아오고, 같은 방식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것을 맞이하는 사람은 매번 달라진다. 그래서 그 계절은 결코 같은 가을이 아니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다시 그 안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문장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대, 가을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을은 이미, 그대를 떠났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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