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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심장에서 피어나는 불

희미해질수록 따스해지는 기억.

by 적적


기억을 비비면 불이 난다.

처음에는 그 불이 손바닥 안에서만 흔들린다. 어린 촛불처럼, 아직 의심이 많은 불. 그러나 조금 더 바람이 스치면, 그것은 망설임을 벗고 세상의 피부를 스민다. 불빛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잃은 자리에서 피어난다. 누군가를 잃고도 여전히 그 이름을 되뇌는 마음의 틈에서, 불은 가장 잘 자란다.



위험은 생의 징후다. 타오른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모든 생은 그 불 앞에서 떨면서도, 동시에 그 불에 기대어 숨을 쉰다. 불이 꺼진 방에서는 아무도 사랑을 기억할 수 없다. 어둠은 냉정하지만, 불빛은 거짓이라도 따뜻하다. 기억은 그 거짓의 온기를 빌려 생을 연장한다.


번져가는 불빛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느리게 확산한다. 불은 언제나 안쪽에서부터 번진다. 눈물보다 깊은 곳, 심장의 내면에서 조용히 퍼져나가, 결국 그 불빛은 눈동자에 닿는다. 그래서 어떤 눈빛은 오래된 기억처럼 반짝인다. 말로는 다 닿지 못한 감정이 그 눈빛에 스며 있다. 그것이 사랑일 수도, 후회일 수도, 아니면 이름조차 잃은 평화일 수도 있다.



재는 남는다. 그러나 그 재 속에는 또 다른 불씨가 숨어 있다. 그것은 절망의 잔해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은밀한 약속이다. 재는 끝이 아니라, 불의 쉼표다. 그 쉼표 뒤에서 기억은 또다시 퍼지기 시작한다.

기억의 불은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그림자를 태운다. 그 그림자들이 사라질 때, 비로소 새로운 빛이 들어온다. 불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다. 태운다는 것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맑은 형태로 돌려놓는 일이다.


어쩌면 기억의 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일지도 모른다. 하루의 해가 지고 나서도, 마음의 어딘가에는 또 하나의 해가 남아 있다. 그 해는 결코 완전히 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희미한 금빛으로 숨을 쉰다. 그 빛이 사람을 다시 일으킨다.



불은 번지고, 번짐은 감정이 된다. 감정은 다시 사람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삶은 또 다른 형태로 타오른다. 모든 사랑, 모든 후회, 모든 용서가 결국 불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면, 기억은 불의 언어로 쓰인 오래된 시다.


그 시는 손끝에서 태어나, 마음의 안쪽으로 번져간다.

읽을수록 타고, 타오를수록 살아난다.



기억은 불완전한 불씨다. 처음에는 손끝에 남은 온기처럼 작고, 시간이 지나면 기름 묻은 천처럼 스스로 번져가며 모든 것을 적신다. 그것은 단단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불안정한 빛의 파편처럼 떠돌며, 닿는 모든 것에 의미의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의 이름, 낡은 사진,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서랍 속의 종이 냄새. 기억은 언제나 그 냄새를 타고 나타난다.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시간의 향기다.



기억을 비비는 일은 마치 먼지 쌓인 거울을 닦는 일과 같다. 닦는다는 행위는 맑히기 위해서지만, 실은 그 손길마다 새로운 얼룩이 생긴다. 투명한 표면 위에 남은 자국은 지워지지 않은 시간의 형상이다. 그 흔적들이 쌓이면, 결국 기억은 처음의 그것이 아니라, 닦인 채로 왜곡된 거울이 된다.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 얼굴은 실재하지 않는다. 단지, 비빈 기억의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은 모든 기억을 희석시킨다고들 하지만, 실은 반대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 짙어진다. 그것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색을 변질시키며 깊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잉크가 종이에 번지듯, 한때의 감정은 다른 감정과 뒤섞이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슬픔은 후회로, 후회는 애정으로, 애정은 어쩌면 무심한 평온으로. 모든 기억은 퍼지며 형태를 잃고, 그 잃어버림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기억을 비비는 순간, 사람은 거짓된 진실에 도달한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간절히 믿고 싶은 이야기다. 기억은 진실을 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지우며 만들어낸 허구의 정원에 가깝다. 그 정원은 매번 가꿀수록 다른 식물들이 자라난다. 어떤 꽃은 너무 밝아서 눈을 태우고, 어떤 풀은 독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식물들은 한때의 감정이 남긴 씨앗에서 자라난다. 진실이 아니라, 감정이 기억을 키운다.



기억이 손끝에 묻은 먼지처럼 느껴진다. 그 먼지를 털어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공기 중에 흩어져 코끝을 자극한다. 비우려는 행위가 곧 채움이 되는 역설. 그래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의 잔향으로 남아, 무심한 순간에 다시 나타난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새어 나오는 잡음처럼. 불현듯 들리는 그 소리에 심장이 미세하게 반응한다.



기억을 비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문지르는 일이다. 오래된 감정의 피부를 다시 만지는 일. 그 표면은 이미 다른 질감을 띠고 있다. 예전의 부드러움 대신, 약간의 거칠음과 냉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냉기는 생의 증거이기도 하다. 감정이 식었다는 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불이 있었다는 뜻이다. 잿빛 아래에 남은 붉은 흔적처럼.



모든 기억은 불완전한 불씨로 남는다. 그러나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는 일은 없다. 다만,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다. 향기가 되어, 색이 되어, 손끝의 온기가 되어.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거는 죽었지만, 기억은 살아 있다. 그 생명은 불완전함에서 비롯된다. 완전한 기억은 존재할 수 없다. 완전함은 죽음과 같다.



누군가는 기억을 덮으려 한다. 그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덮는다는 것은 단지 표면을 가리는 일일 뿐, 그 밑에서 기억은 계속 자라난다. 눌린 풀잎처럼, 다시 빛을 찾을 때를 기다린다. 언젠가,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것은 고개를 든다. 밤새 내린 비가 거리를 적시듯, 기억은 다시 흘러나와 세상의 표면을 덮는다. 그러면 사람은 또다시 그것을 비비며, 새로운 형태의 자신을 만들어낸다.



기억을 비비면 불이 난다.



불은 위험하지만, 따뜻하다. 그 온기 속에서 사람은 다시 숨을 쉰다.


번져가는 불빛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감정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슬픔이든, 미안함이든, 혹은 이름 모를 평화이든.


모든 감정은 번진 기억의 끝자락에서 피어난다.


어쩌면 세상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안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 안을 완전히 볼 수 없고, 다만 손끝으로 그 밀도를 느낄 뿐이다.


안개를 걷어내려 하면, 손이 젖는다.


그러나 그 젖음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기억을 비빈다는 것은, 그 젖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다.


젖은 손으로 세상을 만지면, 세상은 다시 흐릿하게 반응한다.


그 흐릿함 속에서만 진실이 보인다.


기억은 단단히 붙잡을수록 미끄러진다.


그러나 완전히 놓아버리면, 비로소 스스로의 자리를 찾는다.


그것은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시간의 언어로 번역될 뿐이다.


언젠가 들었던 웃음소리가 바람의 결로 변하고,


오래 전의 눈빛이 노을빛으로 남는다.


그렇게 모든 기억은 세상의 색으로 환원된다.


기억을 비빈다.


그것은 번져가기만 한다.


그러나 그 번짐 속에서 생은 자신을 완성한다.


번져야 존재하고, 희미해야 아름답다.


완벽한 기억은 차갑고, 흐릿한 기억은 따뜻하다.


삶은 언제나 그 따뜻함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기억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속 퍼지고, 변하고, 새로이 숨을 쉰다.


그리고 언젠가, 그 번짐이 세계의 빛과 맞닿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모든 기억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져가며, 다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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