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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의 문장

삶이 관통하는 찰나

by 적적




유리 앰플이 깨지는 순간의 맑은 파열음, 하얀 가운의 손끝에서 공기를 빼내는 작은 ‘툭’ 소리, 그리고 그 후에 오는 침묵. 모든 것이 준비된 후에야 바늘은 서서히 피부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때 공기 중에는 이상한 긴장이 감돈다. 누군가는 시선을 돌리고, 누군가는 숨을 멈추며, 누군가는 바늘 끝을 끝까지 바라본다.



바늘이 피부에 닿는 순간은 언제나 예상보다 느리게 온다. 그 얇은 금속의 선이 살의 표면을 뚫기 전, 아주 짧은 공백이 있다. 마치 시간과 육체가 서로를 의심하는 찰나처럼. 그 공백에서 눈동자는 흔들리고, 근육은 무의식적으로 긴장한다. 통증은 그다음에 찾아오지만, 통증보다 더 빠른 것은 두려움이다. 주사란 결국 한 점의 진입이다. 그것은 침입이자 허락이며, 동시에 받아들이는 행위다.


바늘이 들어갈 때, 피하의 미세한 저항이 느껴진다. 살은 물처럼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고요하게 응집된 세계다. 바늘은 그 세계를 통과하며 한순간에 낯선 내부를 목격한다. 투명한 약액이 천천히 밀려들고, 그 작은 용적 안에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물질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쉽게 뚫릴 수 있는 존재인지를 알아차린다. 신체의 경계는 생각보다 연약하고, 한 줌의 의지나 무심한 손끝에 의해 손쉽게 넘어질 수 있다.



주사기는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을 위해 정확하게 설계된 도구이며,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을 관통한다. 그러나 그 정직함이야말로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모호함 속에 산다. 말은 돌려서 하고, 감정은 숨기며, 욕망은 타협한다. 하지만 바늘 앞에서의 모호함은 불가능하다.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거나. 그 사이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바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이 ‘뚫리는 존재’ 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 대기실의 공기는 언제나 희미하게 멸균된 냄새로 가득하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의 팔을 걷어 올리며 차례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그들 모두는 침묵 속에서 작은 기다림의 통로를 지나고 있다. 주사는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반복되는 의식이다. 그 의식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같지만, 그 감각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소매가 천천히 걷혀 올라갈 때, 공기 속에서 얇은 섬유의 마찰음이 미묘하게 번진다. 손목 근처의 살결이 드러나며, 피부는 갑작스러운 노출 앞에서 약간의 긴장을 품는다. 그 순간의 피부는 마치 오래 감춰두었던 비밀을 드러내는 종이처럼 얇고, 빛을 머금은 듯 투명하다. 간호사의 손끝이 닿는 순간, 살결은 미세하게 떨린다. 그 떨림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를 내어주는 방식의 동의다. 알코올 솜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닦일 때, 차가운 기운이 살 속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정화의 의식 같고, 동시에 침입을 위한 예비 동작 같다. 바늘이 닿기 전의 살은 깨끗이 닦인 성소처럼, 긴장 속의 고요로 빛난다.



바늘이 드디어 피부 위에 놓인다. 얇은 금속의 끝은 공기 중의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하는 듯 정교하게 멈춰 있다. 숨이 멎고, 시간은 길게 늘어진다. 그 짧은 순간, 살과 금속의 거리는 믿음과 의심의 거리만큼 멀다. 바늘이 들어가는 찰나, 피부는 아주 조용히 갈라진다. 뚫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얇은 침입은 폭력이 아니라 일종의 번역처럼 느껴진다. 외부의 세계가 내부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 통증은 해석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감각처럼 뒤늦게 찾아온다.


주입이 시작되면, 약액은 바늘을 따라 천천히 이동한다. 그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몸은 그것을 안다. 피하의 어딘가에서 미세한 밀려듦이 느껴지고, 그 안에는 생명과 유예, 혹은 회복의 의미가 뒤섞여 있다. 약액이 밀려드는 동안, 바늘은 조용히 제 존재를 지운다. 그것은 관통의 도구이지만, 통과한 후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마지막 한 방울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간호사의 손목이 가볍게 뒤로 젖혀지고, 바늘이 천천히 빠져나온다. 살은 그때 아주 작은 움츠림으로 반응한다. 마치 자신이 통과당한 흔적을 잠시 기억하려는 듯, 그 부분이 미세하게 붉어진다. 공기와 살이 다시 맞닿는 순간, 몸은 자신이 뚫려 있었다는 사실을 재빨리 감춘다. 그 은폐의 속도는 놀랍도록 생생하다. 생명은 언제나 스스로의 상처를 가장 먼저 봉합하려 든다.



그 위로 솜이 눌려진다. 하얗고 부드러운 섬유가 피부 위에 내려앉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응급처치가 아니라 일종의 위로처럼 보인다. 솜의 하얀색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처를 덮는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방금 전의 파열과 침투, 그리고 미세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다. 솜은 그것을 덮는 동시에 흡수한다. 피의 한 점, 공기의 마지막 흔들림, 그리고 짧은 떨림까지.



잠시 후, 간호사의 손이 솜을 고정한 채 말한다. “눌러주세요.”

그 말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몸이 자기 자신의 경계를 다시 닫는 시간을 주는 명령처럼 들린다. 손가락이 솜을 눌러 잡는 순간, 살은 다시 완전한 육체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짧은 통과의 흔적, 그 미세한 구멍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늘이 빠져나간 자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에서 여전히 맥박치고 있다.



주사의 끝은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으로 남는다 몸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세계가 몸을 통과한 뒤 다시 봉합되는 시간. 그 찰나의 교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쉽게 뚫리고, 얼마나 완벽하게 다시 닫힐 수 있는 존재인지를 배운다. 그리고 그때, 삶은 잠시 동안 가장 정직한 형태로 빛난다.



주사를 맞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일이다. 그 순간, 몸은 타인의 손에 맡겨진다. 의사는 “조금 따가울 거예요”라고 말하고, 그 짧은 문장은 일종의 면죄부처럼 들린다. 그러나 ‘조금’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거짓말 같은가. 사람마다 느끼는 통증은 다르고, 두려움의 길이도 다르다. 어떤 이는 눈을 감은 채 손끝을 움켜쥐고, 어떤 이는 시선을 벽에 고정한다. 그리고 드물게, 끝까지 바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마치 진실을 직접 확인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바늘이 피부를 뚫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평온하다. 두려움과 통증을 넘어선 어떤 종류의 ‘인정’ 같은 것이 있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은 결국, 보이지 않는 바늘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사람 사이의 말, 사랑, 믿음, 상처 그것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주사와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약을 주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독을 주입하기도 한다. 다만 그 차이를 알 수 없을 뿐이다.



바늘이 빠져나올 때, 피부는 잠시 움츠러든다. 작은 구멍이 남고, 그곳엔 붉은 점이 맺힌다. 그것은 너무 작아서 곧 사라지지만, 잠시 동안 존재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 흔적은 말한다. 한때 여기가 뚫려 있었다고, 여기를 통과해 무언가가 들어왔다고. 그 미세한 흔적 속에서 인간의 시간은 한 번 더 흘러간다. 몸은 기억하지 않으려 하지만, 감각은 종종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혹시 주사 맞을 때 바늘 끝을 끝까지 보는 사람은, 어쩌면 삶의 진실을 잠깐이라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일지 모른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침입, 견뎌야만 하는 순간, 그때마다 삶은 묻는다. *“견딜 수 있겠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결국 대답은 몸으로만 가능하다. 통증을 통해서만, 인간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주사를 맞는 일과 닮아 있다. 어떤 바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어떤 약은 이름조차 없다. 하지만 매번 그 바늘들이 우리를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존재로 바뀌어 간다. 변화는 언제나 통증을 동반한다. 그것이 육체의 진실이자 존재의 구조다.



병실의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하늘은 투명한 색을 띤다. 한 사람의 팔 위에서 알코올 솜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닦인다. 바늘은 이미 제 역할을 마쳤고, 시린 감촉만이 남는다. 그제야 숨이 돌아온다. 주사란 결국 삶이 인간에게 묻는 방식이다. 고통 없이 변화할 수 있느냐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신을 열 수 있느냐고.



그 질문에 선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바늘 끝을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 그 사람은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뚫려야만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통증이란 단지 몸의 언어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바늘을 끝까지 바라본다.

산다는 건,


늘 그 가느다란 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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