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뭐 그냥 꼬리입니다.

기술도 계획도 없이 존재하는 품격

by 적적


흔들리는 고양이 모란의 꼬리를 어루만진다. 참고 있다 만지는 손가락을 깨문다.


아프지 않게


가만히 물고 있다.


사랑스럽도록.



세상에는 세 가지 존재가 있다. 의도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쓰는 존재, 제스처를 쓰는 존재, 그리고 꼬리를 흔드는 존재. 그중 꼬리 하나만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종이 있다. 고양이다. 고양이의 꼬리는 온전한 감정의 문장이고, 숨겨진 사상의 선율이며, 우아한 무질서의 깃발이다. 저 단단한 척추 끝에서 피어나는 부드러운 깃털 같은 움직임을 보면 인간의 표정은 생각보다 조잡하고 과장된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기쁨은 환한 웃음으로, 분노는 목소리로, 슬픔은 눈물로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종과 달리, 고양이는 침묵 속에서 꼬리만 툭 하고 들어 올린다. 그러면 방 안의 공기까지 달라진다.



고양이가 있다. 해 질 무렵이면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 한 줄기를 놓치지 않는다. 그 빛은 겨울을 벗기기 직전의 옅은 황금빛. 고양이는 그 위에 누워 공존의 예술을 실천한다. 따뜻함과 냉기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빛이 닿는 부분과 닿지 않는 부분 사이에서, 꼬리는 조용히 흔들린다. 그것은 말하자면 균형의 철학이다. 어느 쪽도 완벽히 선택하지 않고, 양쪽을 모두 소유하는 방식. 인간 세계에서는 우유부단이라 비난받는 태도이지만, 고양이에게는 기품이라 불린다.



꼬리는 느리게, 혹은 빠르게, 때로는 경멸의 리듬으로 흔들린다. 급격히 팡팡 움직일 때 그것은 분노도 아니고 단순한 불만도 아니다. 존재 전체가 순간적으로 깨어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중요한 건 이유가 없다. 고양이는 이유 없는 관심을 갈망하지 않고, 이유 없는 성가심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려 든다면, 이미 패배다. 고양이의 꼬리는 번역을 거부한다. 번역 가능한 감정만 살아남는 인간 세계와 달리, 고양이 세계에서는 번역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권위다.



인간종은 사랑을 말하기 위해 서점에서 두껍고 장식적인 책을 산다. 고양이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바짓가랑이에 몸을 비비고 지나간다. 그 순간 꼬리는 낮게 떨어져 있지만, 끝이 살짝 흔들린다. 거기에는 아무 요구도 없다. 단지 ‘여기 있음’의 선언이다. 사랑의 기원은 소유가 아니라 인접성에 있다는 사실을 고양이는 알고 있다. 함께 있으니 괜찮다는, 억지 없이 다정한 철학. 애정의 밀도는 대화의 양이 아니라 머무는 자리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의해 측정된다는 진실. 고양이 꼬리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의 흔들림으로 말한다.



집 안 구석에서 갑자기 뛰쳐나오는 고양이를. 아무 자극도 없었는데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가더니, 엉뚱한 곳에서 멈춰 숨을 몰아쉬고 꼬리를 곤두세운다. 인간이라면 혼란이라 부르고, 심리 상담을 예약할지도 모를 행동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불안의 연극을 하지 않는다.


순간적 충동을 그대로 실행하고,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꼬리는 그저 다음 순간의 기분을 따라 흔들린다. 충동과 침착이 하나의 몸에 공존하고, 들뜸과 나태가 한낮의 햇살 아래 섞여 졸고, 경계와 무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고양이의 꼬리는 불안정과 안정 사이에서 완벽한 곡선을 만든다. 결론은 포기한 듯 보이나, 사실은 모든 결론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 그건 어쩌면 성숙이 아니라 자유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방은 어딘가 소설적이다. 창밖의 소음, 스마트폰의 알림, 외부의 지나친 정보들이 방 안을 채우는 동안, 고양이는 그 모든 과잉을 무시하고 창밖을 본다. 새 한 마리가 지나가면 꼬리는 미세하게 떨린다. 흥미라는 감정이 몸 밖으로 스며 나오는 순간. 인간은 늘 큰 감동을 찾아 헤매지만, 고양이는 미세한 출구만으로 세계와 만난다. 호기심이란 거창하지 않다.


조용하고 사소하며, 발끝과 꼬리 끝에 머무른다. 어떤 철학자보다도 고양이는 관찰의 미학을 체화하고 있다. 사소한 움직임에서 의미를 찾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변화의 기척을 놓치지 않는다. 거대서사 대신 미세서사. 그것은 생존의 방식이자, 세계를 감각적으로 해석하는 언어다.



꼬리가 불만스럽게 흔들린다. 사람들은 의미를 곡해한다. 기분이 나쁜가, 관심이 필요한가, 배가 고픈가. 그러나 꼬리는 단지 “지금은 방해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을 우아하게 표현하는 중이다. 인간의 거절법은 종종 거칠고 직접적이지만, 고양이는 거절조차 정교하게 수행한다.



고개를 돌리는 대신 꼬리만 흔들어 경고한다. 관계에서 거리를 만드는 기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필요한 순간, 단 한 번의 꼬리 스윙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존재. 자유와 관계가 동시에 가능한 자세다. 애매함 속에서 주권을 유지하는 방식.



결정적 순간, 고양이는 꼬리를 세우고 다가온다. 꼬리 끝이 물음표처럼 구부러진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다. 확신이다. 신뢰가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몸짓. 인간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믿기 위해 수백 번의 대화를 거쳐야 하고, 수많은 우연과 오해를 지나야 한다.


고양이는 단순하다. 마음을 열기로 한순간, 꼬리로 선을 그린다. 가까이 다가오고, 몸을 비빈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 돌아온다. 관계의 리듬은 통제하지 않는다. 흐름에 맡긴다. 고양이 꼬리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배신은 없다. 부재가 곧 이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건 어쩌면 사랑의 성숙한 형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균형을 잡는 일이다. 지나친 열정은 번아웃을 낳고, 과도한 무심은 고립을 가져온다. 계획은 필요하지만, 계획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고양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 꼬리는 흐트러짐과 질서를 동시에 품는다. 부드럽게 늘어지는 오후의 게으름과 번쩍이는 눈빛으로 쥐 장난감을 쫓는 집요함 사이. 그 모든 것이 조화로운 긴장 속에 놓인다.



고양이처럼 산다는 것은 대단해지려 하지 않는 태도다. 대신 감각을 단단하게 유지하고, 기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관계를 과하게 해석하지 않으며, 삶을 극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늘 오늘의 털을 정리할 뿐이다. 어제의 먼지는 떨어뜨리고, 내일을 대비하지 않는다.



고양이 꼬리처럼 살아내기. 그것은 곧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무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선언도 아니다. 오히려 고양이의 철학은 굽힘과 유연함 속에 숨어 있다. 꼬리는 휘어지고, 흔들리고, 펄럭이며 세상과 대화한다. 똑바로 서 있는 순간보다도, 흔들리는 순간에 더 많은 진실이 숨어 있다. 움직임 속에서 균형이 생기고, 유머가 피어나며, 우아함이 형성된다.


고양이는 비극도 희극도 아닌, 미묘함의 존재다. 그리고 인생은 대부분 미묘함 속에서 흘러간다. 너무 슬프지도, 너무 기쁘지도 않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성장과 노화를 만들어낸다.



결국 삶은 꼬리의 흔들림처럼 흘러가야 한다. 이유 없는 기분의 변화도 허용하고, 무의미한 충동에 잠시 몸을 맡기기도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알아차리는 감각. 그리고 누군가 옆을 지나갈 때, 조용히 스치며 존재감을 전하는 여유. 언어보다 느린 메시지. 계획보다 부드러운 의지. 그것이 진짜 품격이다. 꼬리를 들어 올릴 줄 알고, 내려놓을 줄 아는 몸. 기분을 숨기지 않되, 과장하지 않는 마음. 잠시 사라져도 괜찮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관계.



고양이 꼬리처럼 살아간다면 삶은 조금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복잡한 고민은 갑자기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어딘가로 흩어질 것이고, 감정은 쉽게 말리지 않을 것이다. 행복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따뜻한 햇볕 한 줄기일 것이며, 사랑은 설명 대신 머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 덜 무겁고, 조금 더 유머러스해질 것이다. 꼬리가 흔들리는 동안, 모든 순간은 잠시 살아난다. 존재는.



그 흔들림 속에서 빛난다.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12화사라지는 것들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