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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와 여백의 연대기

버틴 어둠과 열리는 세계의 조우

by 적적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코제트며, 장발장인지도 모른다.



빛이 스며드는 골목은 새벽마다 고요하게 숨을 고른다. 차가운 공기는 가늘게 떨리고, 먼지는 자신이 머물 자리를 알고 있다는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정적 속에서 어린 소녀의 시간이 아주 천천히 열린다. 코제트의 시간은 아직 가벼웠다.



마른 빵을 손바닥 위에서 굴려보던 기억처럼, 작디작은 몸은 늘 자신보다 큰 세상을 맞닥뜨렸으나 고통조차 나이를 닮아 흐릿했다. 추위는 완전히 얼지 못했고, 배고픔은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었으며, 두려움은 밤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왔다. 형태를 갖지 못한 슬픔, 가느다란 기침처럼 번지는 외로움. 비어 있기 때문에 스며들 여지가 남아 있고, 비어 있으므로 희망이 머물 틈도 있었다.



장발장의 시간은 묵직하게 굳어 있었다. 오래된 짐승의 발걸음처럼 느리고, 겨울나무껍질처럼 거칠고, 건조했다. 세월은 그의 몸에 금을 그었고, 그 금 속에서 고독은 천천히 굳어 포도석처럼 무게를 더했다. 도망치는 발걸음은 흩날린 흔적을 지우기 위해 항상 땅을 더 세게 밟았고, 지우려는 몸짓은 곧 살아온 시간을 거부하는 고된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쇠사슬이 되는 시간. 장발장에게 시간은 지나가는 흐름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는 족쇄, 이름을 잃지 않는 상처였다. 희망은 샛길처럼 잠시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고, 어둠은 느리지만 틀림없이 그를 감싸며 내려앉았다. 죄책감은 피보다 무거웠고, 세월은 사람을 세계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의 어깨에 얹혀 있었다.



코제트의 시간은 길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궁금해하는 나이, 문턱 너머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군가 돌아올 것이라 믿던 순간들. 불확실보다 기대가 먼저 자리했고, 세상은 넘어지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확신이 작은 몸을 붙들었다. 차가운 돌바닥을 디딜 때마다 또렷하게 울리는 발소리, 미끄러졌다가도 금세 다시 균형을 찾는 손끝. 흔들릴수록 빛나고, 작을수록 더 또렷한 존재. 증명되지 않아도 이미 충분했던 생의 반짝임이 있었다.



장발장의 시간은 이미 길 끝을 알고 있었다. 돌을 들 때마다 손등에 드러나는 굳은 줄기, 무게를 견디기 위해 굳어진 어깨, 그 누구도 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들. 무너질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었고, 짓밟히는 사랑을 알고 있었고, 잊혀지는 인간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의 고요는 늘 경계의 기척을 품었다. 평온 속에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불안의 톱니바퀴, 작은 숨 사이에 숨어 있는 망설임. 그러나 그 무거운 시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온도가 있었다. 깊게 그을린 삶에서 나오는 뜨거움, 잃을 수 있음을 아는 손아귀의 단단함. 사랑은 때때로 오래 상처를 기억한 자의 품에서 가장 진하게 피어난다.



코제트의 시간은 따뜻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이름을 부르는 온기,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에 겹칠 때 느껴지는 안도. 아직 사랑을 모를 때부터 사랑을 기대하는 마음은 있었다. 기대는 속절없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방 안에 고르게 퍼지는 작은 숨, 그것만으로도 내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새벽의 꽃봉오리처럼 아직 열리지 않았으나 이미 안쪽에서 힘이 자라고 있었다.



장발장의 시간은 누군가의 미래를 대신 짊어지며 다시 뜨거워졌다. 지울 수 없는 과거가 발목을 잡아도, 발걸음은 다른 생을 향했다. 어둠을 완전히 덮을 수 없었으나, 그 위에 빛을 덧칠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보호하려는 의지는 죄보다 컸고, 감추고 싶은 흉터는 오히려 품을 넓히는 바닥이 되었다. 죄책감은 때로는 오래된 사랑의 다른 모습이 된다.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도 다시 걷고 싶은 길을 발견하는 순간. 회복이 아닌, 회복을 향한 의지. 구원이 아닌, 구원을 믿게 되는 숨.



두 사람의 시간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면서도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닿았다. 어린 심장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늙은 심장은 세상을 다시 믿는 법을 배웠다. 피가 아닌 선택이 두 시간을 잇고, 기억이 아닌 시선이 둘의 세계를 묶었다. 코제트가 얻은 시간은 장발장이 잃은 시간 위에서 피었고, 장발장이 되찾은 시간은 코제트의 눈동자에서 다시 숨을 얻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 빛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누군가의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덮는 순간, 그곳에는 잠시나마 시간의 평등이 있다. 감금된 시간과 구원받는 시간이 맞닿는 순간, 세상은 조용히 움직인다. 사랑은 시간에 이름을 붙인다. 지나간 무게, 닿지 않은 미래, 그리고 지금의 호흡. 모든 결이 한순간에 이어진다.



작은 손이 세상을 향해 뻗는다. 한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믿었던 손이 그 손을 감싼다. 오래된 흉터와 아직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피부가 닿고, 그 아래에서 두 시간은 같은 흐름이 된다. 남은 것이나 잃은 것이 아닌, 함께 흘러가는 시간. 그 함께라는 사실 하나로.



오래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숨을 얻는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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