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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보다 마음을 먼저.

비밀스러운 온도가 감정을 되살리는 법.

by 적적


전열선이 조용히 몸을 데울 때, 방 안에는 작은 발화점이 생긴다. 전기장판의 불빛 없는 열이 바닥을 타고 움직이며 이불 아래로 스며들고, 이 방은 외부의 모든 냉기를 천천히 배제한다. 온도의 상승은 극적이지 않다.

그저 손끝이 먼저 변하고, 발목이 느린 속도로 해방된다. 찬 공기는 구석으로 몰리고, 가느다란 열선이 여러 개의 얇은 숨을 내쉬는 듯한 순간, 아무도 모르는 내면의 계절이 바뀐다. 이불속에서 천천히 연소되는 이 작은 열원은 사랑보다 조심스럽고, 기억보다 은밀하게 깊어진다.



벽지의 작은 흠집들, 오래된 책장의 약간 기운 선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테이블의 커피 자국. 이 공간은 공기 대신 시간을 품고 있고, 그 시간은 사람의 체온보다 조금 더 차가운 채로 존재한다. 전기장판이 켜진 순간, 이 쓸쓸한 시간들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습한 겨울밤의 냉기를 뱉어내고 천천히 부드러운 촉감을 회복한다. 바닥과 몸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동안, 이 집은 더 이상 외로운 건축물이 아니다. 존재라는 이름의 작은 가게가 오늘도 불을 켜는 것이다.



겨울은 몸이 영혼보다 먼저 늙는 계절이다. 차가운 바람이 뼈 사이로 스며들면,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과거의 순간들은 서랍 속 양말처럼 낡고 구김 가득해도, 꺼내면 여전히 체온을 가진다. 전기장판이 데우는 것은 단순한 살갗이 아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의 이랑, 문득 손을 대면 쏟아질 것 같은 기억의 얼음도 함께 녹아내린다. 열이 서서히 번지는 동안, 움직임 없이도 사람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이불 위에는 구겨진 셔츠가 놓여 있다. 며칠 전 급하게 벗어둔 흔적이 그대로다. 옷깃에 남은 작은 향수가 공기 속으로 희미하게 증발하며 방 안의 온도와 섞인다. 창가의 화분은 물이 모자라 잎이 축 늘어져 있고, 다 마시지 못한 커피잔은 겨울 공기를 견디며 서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저분한 풍경이겠지만, 이 공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되돌아올 수 있다는 안도감의 증거다. 전기장판이 켜지는 순간, 그런 사소한 사물들이 새삼스럽게 살아난다. 더 이상 잊힌 잔해가 아니다. 존재를 증명하는 단서로서, 침묵 속에서 제 목소리를 회복한다.



열은 고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의 배려도, 설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뜻함은 다만 존재로 성립된다. 어떤 관계는 말보다 먼저 체온으로 이해되고, 해명보다 오래 침묵으로 지속된다. 여기서 온도는 감정의 물성이다.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침묵 속에서도 전달되는 온기는 서로를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림은 요구가 아니고, 머묾은 소유가 아니다. 사랑은 때로 불꽃 없이 데워지는 마음이다.



창문 밖 거리에는 가로등이 번쩍이고, 밤공기는 흩어진 먼지처럼 고요하다. 도로 위 자동차들은 희미한 소음을 끌고 천천히 지나간다. 이 도시의 밤은 거대한 냉기처럼 사람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이 방 안에는 은밀한 온도가 쌓이고 있다. 외부의 추위와 내부의 열이 충돌하는 경계에서 사람은 살고, 그 경계의 균형은 종종 무너진다. 어떤 날에는 추위가 이기고, 또 어떤 날에는 작은 온기가 사람을 구한다. 오늘은 열이 조금 앞섰다.



전기장판은 흔하디 흔한 겨울의 장치다. 그러나 평범한 것은 가장 깊은 진실을 품는다. 애써 꾸미지 않는 사물에서, 사람은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사치스럽지 않은 따뜻함은 진심과 닮았다. 손등 위에 가볍게 얹힌 손처럼, 말없이 건네는 마음처럼, 그것은 생존을 넘어서 존재의 이유가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느리게 수행되는 위로, 그 느린 위로가 사람을 천천히 다시 살아가게 한다.



어떤 온도는 잊히지 않는다. 어린 시절 덮었던 누런 솜이불의 묵직한 촉감, 시골집 부엌 아랫목의 은밀한 열기, 손가락 끝으로 스치던 누군가의 느리고 따스했던 엄지나 검지였을 손가락. 전기장판 위에서 잠드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안정된 세계를 다시 상상할 수 있다. 온도는 기억을 깨우고, 기억은 다시 감정을 만든다. 그 감정이 다시 사람을 움직인다. 결국 삶은 반복된 체온의 역사다.



이불속에서 몸이 점차 물러지는 동안, 이 방은 겨울의 중심에서 혼자 빛난다. 누구의 환호도 필요 없고, 증명할 것도 없다. 온도가 천천히 세상을 둥글게 만든다. 거친 숨결과 날 선 생각이 부드러워지고, 잠들기 직전의 꿈결처럼 현실이 눅눅해진다. 불완전함은 허용되고, 취약함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런 밤에만 사람은 온전해진다.



전기장판이 꺼지면 다시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겨울은 조금은 덜 두렵다. 이번 밤이 남긴 온도가 피부 아래에 남아 있을 테니까. 열은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고, 기억은 흐려지지만 옅게 남는다. 그리고 그 잔열이 또다시 다른 열을 부른다. 이렇게 사람은 견디고, 기다리고, 살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전기장판을 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방은 지금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감정의 발아지 다. 조용한 열, 눈에 보이지 않는 온기, 혼자 있어도 함께인 듯한 밤. 겨울은 여전히 밖에 있다. 그러나 안쪽에서 피어오른 이 미세한 온도는 하나의 증언이다. 추위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따뜻해질 수 있다는, 그리고 그 따뜻함은 아주 사소한 선택에서 시작된다는.



전기장판을 켰습니다. 늦가을은 여전히 춥겠지만, 적어도 이 방만큼은 겨울을 들여보내지 않고 있다. 잠시 머무는 온도 속에서.



이름 없는 마음이 다시 태어난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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