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라지는 것들의 무게

투명함이 단단해지는 순간

by 적적

그렇게 소중했던가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간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앞두면 공기는 언제나 이상하게 투명하다. 공기는 얇은 유리처럼 손끝에 닿자마자 부서지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름의 그림자와 겨울의 전조가 동시에 묻어 있다. 창가에 떨어진 빛이 아직도 따뜻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다시 마음을 허물어뜨리지만, 그 따뜻함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이런 아침엔 기억조차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는 일은 늘 그만큼의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중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난 자리엔 기묘한 적막이 남는다. 그것은 비어 있는 공터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지나간 뒤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설 수 없는 자리다. 언젠가의 웃음, 짧은 손짓, 무심히 건넨 인사까지도 시간의 틈새로 밀려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한때는 세상을 지탱하던 기둥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연약했던가. 한순간의 숨결, 한 줄의 문장, 혹은 벗겨진 나뭇가지의 소리만으로도 무너질 만큼의 균형이었다.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것들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다. 남아 있는 것은 없어도, 사라진 것들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 사람의 윤곽을 만든다. 오래된 창문에 스민 먼지처럼, 손끝의 체온이 스러진 뒤에도 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소중함이란 결국 사라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존재할 때는 인식되지 않다가, 비로소 잃고 나서야 그 무게가 실체를 드러낸다.



아침의 공기 속에는 어제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소중함의 마지막 형태일 것이다. 이미 닫힌 문, 이미 멈춘 시계, 이미 식어버린 찻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세계의 표면에 잔열처럼 남아 있다. 인간은 그 잔열 위에서만 과거를 이해하고,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다시 회한에 빠진다. 기억은 늘 부정확한 온도를 유지한다. 너무 뜨겁지도, 완전히 식지도 않은 채로 마음의 중간쯤에서 불안하게 떠다닌다.

어떤 관계들은 지나고 나서야 그 본질이 드러난다. 함께 있던 순간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던 말투나 시선이, 시간이 흐른 뒤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재조립된다. 그렇게 뒤늦게 찾아오는 이해는 언제나 늦다. 늦음 속에서만 진실이 완성되고, 진실이 완성되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다. 그 순서가 바뀌는 일은 없다. 그러니 회한은 언제나 인간의 마지막 감정이다.



소중했던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들이 정말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의심은 곧 사랑의 잔재다. 완전히 잊은 것들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묻는 행위 자체가 아직 마음 일부가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소중함은 사라지지만, 회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잔재가 아니라, 감정이 남긴 형상이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조금의 피로와 약간의 깨달음이 섞여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모두 견뎌낸 듯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미세한 흔들림 속에 있다. 소중함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있었던 흔들림만 남기고, 그 본래의 온도와 색을 지워버린다. 사람은 그 흔들림을 사랑이라 부르고, 뒤늦게 그것을 상실이라 부른다.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불안과 함께 온다. 잃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이미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언처럼 정확하다. 아무리 단단히 쥐고 있어도, 소중한 것들은 결국 손바닥의 틈으로 새어 나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손가락 사이에 스며든 냄새나 온도 같은 미세한 잔향이다. 그 잔향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된다.



시간은 모든 소중함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만이 그 소중함의 진가를 드러내기도 한다. 너무 가까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선명해진다. 그것은 마치 해 질 무렵 창가에 앉아 오랜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과 같다. 빛이 약해질수록 그림자는 또렷해지고, 존재는 오히려 명확해진다. 사라지는 것만이 남는 것의 형태를 정의한다.



누군가의 이름이 이제는 아무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때조차, 그 이름의 울림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마음의 뒷면에 새겨진 음각 같은 것이다. 만져지지 않지만,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소중했던 것들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도 말을 건넨다. 그 목소리는 너무 낮고, 너무 멀리서 들려서 때로는 바람 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분명히 있다. 기억은 결코 완전히 침묵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잊기 시작한다. 그러나 잃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감각적으로 남는다. 마치 익숙한 노래의 가사는 잊었지만, 멜로디만은 어렴풋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소중함이란 결국 잊히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다른 감정으로 변질된 것이다. 잊히면서도 남아 있는 상태, 그것이야말로 회한의 형태다.



오늘 아침의 공기는 어딘가 불완전하다. 빛은 부드럽지만, 그 안에 서늘한 그림자가 섞여 있다.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마음의 시간은 조금 느리다. 그 느림 속에서 사람은 어제의 장면을 천천히 되짚는다. 그리고 문득 묻게 된다.


그 모든 것이, 그렇게까지 소중했던가.



한때의 웃음이 지금의 고요보다 귀했을까. 손끝의 떨림이 지금의 공기보다 따뜻했을까. 그렇게 묻는 일은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사라진 것들을 다시 한번 불러보는 의식 같은 것이다. 불러봄으로써만 사라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소중함이란 결국 사라질 것을 전제로 한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상실은 그 감정의 완성이고, 회한은 그 완성의 그림자다.

10월의 아침은 그 그림자를 길게 끌고.

또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11화사라지는 사람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