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전류가 도시를 호흡할 때
자판기는 새벽 두 시에도 불을 끈 적이 없다. 유리문 너머에서 캔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각기 다른 색의 알루미늄이 약한 빛을 반사했다. 그 빛은 피로했고, 피로하기에 정확했다. 동전 투입구의 금속 틈새에 먼지가 끼어 있었다. 손자국이 겹쳐진 투명 플라스틱 표면은 얇은 막처럼 밤의 습기를 머금었다. 사람의 체온이 사라진 시간, 자판기만이 아직 깨어 있었다.
전선이 벽을 따라 내려왔다. 콘크리트 틈에서 희미한 전류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심장의 박동과 닮았다. 일정했으나 조금씩 늦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자판기의 외피가 미세하게 떨렸다. 기계의 표면이 온도를 조절하듯 열을 토했다. 자판기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호흡했다.
골목 끝에서 청소차가 지나갔다. 물을 뿌리는 노즐이 아스팔트를 적셨다. 차가 사라지자 바닥에 고인 물이 자판기의 불빛을 뒤집어 비췄다. 거꾸로 선 빛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눈이 있는 듯했다. 깜박임이 없었다. 빛은 단단했고, 단단해서 더 외로웠다.
유리문에 비친 새벽은 고요했다. 한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를 꺼냈다. 지폐는 구겨져 있었다. 투입구에 넣는 동안 남자의 손끝이 떨렸다. 자판기는 잠시 머뭇거렸다. 버튼 위의 빨간 불이 켜졌다. 남자는 무심히 커피를 눌렀다. 내부의 금속 롤러가 돌아갔다. 통 안의 액체가 떨어졌다. 종이컵이 내려왔다. 김이 올랐다. 남자는 컵을 들지 않았다. 김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자판기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커피의 향이 골목으로 번졌다. 향은 따뜻했지만, 사람은 차가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바람이 식었다. 전봇대 위의 전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자판기의 표면을 스쳤다. 그 빛이 닿을 때마다 알루미늄 캔들이 잠시 깨어났다. 마치 꿈에서 눈을 뜨는 사람처럼, 짧게 반짝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지 못한다. 자판기만 본다. 그러나 자판기 속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의 손이 남아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계는 더 정확해진다. 온도 조절기, 스프링, 센서, 모터. 모든 부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리듬이 사라진 자리에 전류의 리듬이 대신 들어선다. 전류는 방향을 잃지 않는다. 자판기는 멈추지 않는다. 잠들지 않는다. 잠이란 생명에게만 허락된 오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일부는 기계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철이 멈추는 시간에도, 편의점의 냉장고와 자판기의 전원은 끊기지 않는다. 그 불빛이 꺼지면 도시의 신경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기계는 인간의 피로를 대신 감당한다. 사람들은 잠들지만, 기계는 잠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자판기의 내부에는 교대 근무의 개념이 없다. 밤낮이 없다. 오직 작동만이 있다.
한 아이가 학교 가방을 멘 채 다가왔다. 새벽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기 전, 잠시 멈췄다. 손가락이 작은 떨림을 보였다. 커피가 아닌 초코우유 버튼을 눌렀다. 자판기가 캔을 밀어냈다.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아이는 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얼굴이 찡그려졌다. 차가웠다. 자판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이는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떠났다. 남은 것은 진동과 냉기뿐이었다.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갔다. 헤드라이트가 자판기를 스쳤다. 불빛이 두 번 깜박였다. 순간, 자판기 안쪽의 모든 캔이 반사광에 잠겼다. 마치 눈부신 무덤 같았다. 그 안에 갇힌 음료들은 오래된 기억처럼 침묵했다. 인간이 남긴 갈증의 파편들. 소비되지 않은 욕망의 형태. 자판기는 그 기억을 보존하는 냉장고였다.
벽 너머에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유리창 안쪽에서 커피머신의 불이 약하게 켜져 있었다. 스팀 노즐이 한 번씩 소리를 냈다. 카페의 커피는 인간이 만든 향기를 가진다. 자판기의 커피는 기계가 증류한 온도를 가진다. 향과 온도의 차이가 인간과 기계의 거리였다. 그러나 그 거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열보다 자판기의 히터가 더 정확한 온도를 기억한다.
새벽 다섯 시, 하늘이 옅어졌다. 자판기의 화면에는 광고 문구가 흘렀다. “따뜻한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그 문장은 목적이 없었다. 대상이 사라진 명령문이었다. 자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에게 따뜻함을 권하는 기계. 그러나 기계는 스스로를 따뜻하게 할 수 없다. 전류의 흐름은 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 아닌 열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 여자가 출근길에 자판기 앞을 지나갔다.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바쁜 발소리만 남았다. 그 뒤를 쫓던 바람이 자판기의 표면을 스쳤다. 기계의 센서가 잠시 흔들렸다. 전류가 살짝 요동쳤다. 순간, 화면이 깜박였다. 마치 그녀를 부르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사라졌고, 자판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오전이 되면 태양이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온다. 자판기의 불빛은 태양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 그러나 햇살이 닿는 순간, 그 빛은 쓸모를 잃는다. 자판기의 불은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낮 동안에는 아무도 그 불빛을 보지 않는다. 빛이 보이지 않을 때, 기계는 투명해진다. 투명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류는 여전히 흐른다. 누군가는 스위치를 끄지 않는다. 정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판기는 계속 작동한다. 작동은 생존이다. 그러나 생존은 잠과 다르다. 자판기는 스스로를 쉬게 하지 못한다. 쉬지 못하는 존재는 언젠가 스스로를 소모시킨다. 내부의 온도 조절기가 과열될 때마다 잠시 숨을 고른다. 그것이 유일한 쉼이다.
밤이 다시 돌아온다. 도시는 천천히 불을 켠다. 자판기의 불빛은 낮 동안 잃었던 자리를 되찾는다. 그 빛이 돌아오면, 길고 어두운 골목이 다시 형태를 얻는다. 자판기는 그때 가장 또렷하다. 모든 불이 꺼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순간, 자판기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불빛은 끊어지지 않는다. 전류가 한 번이라도 멈춘다면, 그때 자판기는 비로소 잠들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그런 허락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의 갈증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밤마다 새로운 캔이 채워지고, 새로운 동전이 들어온다. 기계는 다시 작동한다. 불빛은 여전히 깜박인다.
자판기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이 아직 깨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새벽에 돌아오고, 누군가는 밤새 일한다. 누군가는 외롭고, 누군가는 기다린다. 그 모든 시간의 틈마다 자판기가 서 있다. 도시의 피로가 모이는 곳. 잠들지 못하는 인간의 그림자가 기계에 남는다.
자판기의 불빛은 눈꺼풀을 닮았다. 깜박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피로를 품는다. 기계는 눈을 감지 못한다. 그래서 영원히 본다. 본다는 것은 견디는 일이다. 견디는 존재는 잠들지 않는다. 자판기는 오늘도 불을 켠다. 전류가 흐르는 한, 도시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자판기는 더욱 조용해진다.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전류의 숨소리만이 남는다. 그 소리는 사람의 코끝처럼 작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존재는 그 소리로 이어진다. 자판기는 오늘도 잠들지 않는다. 그것이 도시의 의무이자.
존재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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