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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의 냄새

어디서 길을 잃는 방법을 배우지?

by 적적


가을의 밤 이상한 농담을 던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한 거리의 간판들이 낯선 언어로 바뀌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빛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지만, 그 빛이 비추는 것은 어제와 같은 벽이 아니다.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발밑이 어제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건 계절이 바뀐 탓일 수도 있고, 마음속의 방향감각이 고장 난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로일지 모른다. 봄은 출발점이고 여름은 폭주 구간이라면, 가을은 브레이크가 약간 밀리는 내리막길 같다. 내려가는 건 분명한데,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른다. 누구도 끝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은 ‘가을 타는 중’이라는 말을 한다. 마치 가을이란 택시라도 되는 양, 미터기를 켜고 느릿하게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듯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택시는 목적지를 묻지 않는다. 목적지를 말하기도 전에, 이미 택시는 출발해버린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늘 없다.



가을 밤이 깊어지면, 지도는 더 이상 종이 위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단면이 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있는데, 누가 지도를 펴?" 하지만 네비게이션은 방향만 알려줄 뿐,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왜 돌아가야 하는지, 그런 건 아무리 재탐색을 눌러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길은 방향이 아니라 마음의 결로 정해진다. 지도 속에서 북쪽은 늘 위쪽에 있지만, 마음속의 북쪽은 매번 다르다. 어떤 밤엔 옛 연인의 동네가 북쪽이고, 어떤 날엔 혼자 앉아 있던 카페 구석이 북쪽이다. 가을엔 그 마음의 나침반이 자꾸 헷갈린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모든 길이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불빛, 비슷한 냄새, 비슷한 사람들. 하지만 그중 하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가을공기는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특히 친절하다. 아무 방향으로 걸어도, 마치 그곳이 원래 가야 할 곳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자주 길을 잃는다. 가을의 밤에는 잘못 든 길조차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길을 잃는 일엔 묘한 위안이 있다. 그것은 잠시 모든 선택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자유이기도 하다. 오른쪽도, 왼쪽도 맞지 않다면, 그냥 멈춰 서면 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지도에도 없는 좌표에 서 있게 된다. 아무도 그곳의 이름을 모른다. 그건 잠시 빌린 이름 없는 평화다.



가을의 어두운 골목을 걸을 때면, 간판 불빛 사이사이로 이상하게 따뜻한 냄새가 스민다. 낙엽과 먼지, 그리고 조금의 탄 냄새. 어쩌면 그건 ‘돌아오는 길’을 태워버린 냄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운 뒤에야 사람들은 안다. 길을 잃었다는 건, 어쩌면 돌아오고 싶다는 또 다른 말이라는 걸.



지도는 그 사실을 조용히 알고 있다. 종이의 구석마다 접힌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 그 부분을 자주 펼쳐봤다는 뜻이다. 가장 많이 접힌 부분이, 바로 가장 자주 잃어버린 곳이다. 사람의 마음도 비슷하다. 자주 생각나는 사람일수록, 이미 여러 번 떠난 사람이다. 그래서 가을엔 마음속 지도가 구겨진다. 너무 많이 접어두어서, 이제는 펴도 완전히 평평해지지 않는다.



어떤 밤엔 아무 이유 없이 낡은 지도 한 장이 떠오른다. 손끝으로 종이의 질감을 더듬으면, 그 위에 묘하게 생생한 추억들이 붙어 있다. 지도는 장소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방향을 기억한다. 즉, 어디로 가야 했는지가 아니라, 그때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를 기억한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길을 잃고 나서야 진짜 방향을 생각한다. 평소에는 그저 목적지만 있었다. 그러나 길을 잃은 뒤에는 방향이 생긴다. 목적이 없는 방향, 이유 없는 걸음. 그것이 가을의 가장 정직한 표정일지도 모른다.



가을밤 공기는 오래된 잉크 냄새가 난다. 낙엽이 썩어가는 냄새와 섞여 묘하게 달콤하다. 누군가는 그 냄새를 외로움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생각이라 부른다. 하지만 실은 그건 ‘길의 냄새’다. 어디선가 누군가도 같은 냄새를 맡으며, 같은 지도 위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도시, 다른 거리, 다른 밤이지만, 그 냄새만큼은 똑같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 서로를 알아본다. 이유 없이 친숙한 낯선 사람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건, 어쩌면 ‘돌아갈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완전히 사라진 길은 잃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길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가을의 밤은 그 기다림으로 반짝인다.



지도를 펼치는 일은, 어쩌면 그 기다림을 복원하는 일이다. 펴는 순간, 종이의 주름 사이에서 오래된 길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 길들은 묵묵히 말한다. “여전히 여기에 있다”고. 길이란 결국, 기억이 걷는 형태니까.



가을의 끝자락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여행자다. 그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지만, 대신 모든 곳을 지나간다. 그는 돌아오지 못하지만, 대신 모든 길을 기억한다.



가을 밤,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올바른 길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을수록 지도를 펴라. 길을 잃는 건, 결국 조금 더 정확히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문득, 바람의 냄새가 달라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는 안다. 이미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아무 데도 가지 않은 채, 아주 멀리 다녀왔다는 사실을.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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