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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오후, 고래가 빛으로 돌아왔다.

by 적적

가을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 순간 공기가 서서히 비틀렸다. 희미하게 뒤틀린 빛의 표면이 마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시 떠오르는 귀신고래의 등허리처럼 보였다. 보도블록의 틈을 따라 스며드는 금빛은 고래의 체온 같은 잔열을 품고 있었고, 오래전에 한 번은 존재했으나 지금은 부재라는 사실만 남긴 거대한 생명체의 숨결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은 밝음보다 기척으로 먼저 다가왔다. 손등 가까이 스칠 때 느껴지는 미세한 온도 차이가 물속에서 부유하는 거대한 그림자의 윤곽처럼 느린 파동을 남겼다.



바람이 몇 번 지나가도 빛의 구조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건물 벽면에 부유하는 먼지가 햇살의 결을 따라 흘렀고, 그 흐름이 마치 고래가 헤엄칠 때 남기는 소용돌이의 잔재처럼 보였다. 골목 끝에서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빛의 조각들은 고래가 수면을 눌러 올릴 때 생기는 조용한 파문과 닮아 있었다. 그 조각들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순간, 어딘가 먼바다의 밑바닥으로 어스름하게 가라앉는 음향이 들리는 듯했다.



가을 햇살은 사실 어떤 온기보다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손바닥에 얹히는 따스함보다, 그 온기를 통과한 뒤 남는 미세한 온기가 먼저 감지됐다. 고래의 몸이 지나간 뒤 바닷물 전체가 한순간 가라앉는 현상처럼 빛도 주변의 분위기를 한 계단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다. 햇살은 스스로 빛나면서 동시에 주변의 온도를 빼앗아 갔다. 밝은데 서늘했고, 환한데 침잠을 유도했다. 고래의 거대한 돌출음 없이도 세상이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햇살 위에서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의 외곽선은 마치 사라진 고래가 마지막으로 남긴 윤곽처럼 뒤틀렸고, 빛이 그림자의 가장자리에 걸리며 투명한 막을 형성했다. 막은 고래의 지방층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햇살이 인간의 몸을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물속 생명체가 한때 지구의 다른 지층을 헤엄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고래의 완만한 헤엄처럼 느렸고, 걸음마다 그림자는 새로운 파문을 남겼다.



낙엽이 땅에 내려앉는 소리도 그날따라 묵직하게 들렸다. 바람이 낙엽을 들어 올릴 때 생기는 소리의 두께가 평소보다 훨씬 두꺼웠고, 그 질감은 고래의 피부를 연상시키는 거칠고 매끈한 음색을 동시에 품었다. 낙엽이 여러 장 겹쳐져 발밑에서 구겨지는 순간, 고래가 해수층을 통과하며 수온을 바꾸는 장면이 겹쳐졌다. 빛은 낙엽 위에서 반사될 때마다 불규칙한 금빛 패턴을 만들었고, 그 패턴은 물 위로 드러났다 다시 사라지는 거대한 해양 생명체의 어둑한 광택을 닮아 있었다.



주택가 창문에 매달린 커튼도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조각냈다. 커튼의 섬유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고래의 표피에 점처럼 박힌 흰 반점과 비슷했고, 반점은 햇빛을 흡수하기보다 밀어내는 듯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커튼 뒤편의 방 안은 외부보다 훨씬 어두웠고, 그 어둠은 마치 고래가 수십 미터 아래에서 떠올리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고요와 닮아 있었다. 햇살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순간 다시 형태를 잃었고, 형태를 잃는 방식이 고래가 심해로 사라질 때와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공원 벤치의 손잡이에는 차가운 금속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반짝임은 고래의 이마에 달린 혹 같은 돌기를 연상시켰고, 금속 표면의 잔 기스는 오래된 생명체의 피부 위에 남은 과거의 상처처럼 보였다. 벤치에 앉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싸는 빛의 무늬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고요히 시야를 털어냈고, 그 무심한 태도마저 고래의 유영과 비슷한 리듬을 만들었다. 움직임은 없지만, 분위기는 계속 진행되는 특유의 잔잔한 진동.


가로수 그림자 아래로 들어가는 순간 빛은 다시 밀도를 바꾸었다. 나뭇잎 사이로 투과된 햇살은 물속에서 필터를 통과한 빛처럼 흐릿했고, 빛이 땅에 닿는 면적은 고래의 등지느러미처럼 길고 얇았다. 그림자의 경계선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고래가 수면 가까이 떠오를 때 생기는 바다 결의 미세한 진동과 비슷한 떨림이 땅에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햇살은 나뭇잎 한 장을 건드릴 때마다 조용히 부서졌다. 그 부서짐은 고래의 숨이 물 위에서 기포로 터지는 순간과 닮아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그 맑음의 중심에서 햇살은 더딘 각도로 기울어졌다. 고래가 몸을 틀어 방향을 바꿀 때 만들어지는 느린 소용돌이처럼 빛도 천천히 방향을 바꿨다. 건물의 유리창은 그 빛을 받아 깊은 회색빛을 띠었고, 회색 속에서 금빛이 얕게 깜빡였다. 깜빡임은 심해 생명체의 발광 기관과 같은 리듬을 띠고 있었고, 유리의 표면은 단단한 해양 생물의 등껍질처럼 매끄러웠다. 그 위를 스치는 햇살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여러 겹으로 겹쳐진 그림자의 무게를 견디며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깃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도 낮고 길게 이어졌다. 옷깃의 실루엣이 햇살에 의해 얇은 금빛 선으로 둘러싸이자, 마치 고래가 먼 바닥에서 자기의 외곽을 드러낼 때의 희미한 발광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도 바다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고래의 저주파 음향처럼 둔탁했다. 도시 전체가 잠시 같은 리듬으로 호흡하는 듯했고, 그 호흡은 가을 햇살의 깊고 무거운 기척과 정확히 겹쳐졌다.

가을 햇살은 결국 그날 하루를 통과하며 도시의 모든 면을 은밀하게 훑고 지나갔다. 고래가 바다 밑바닥의 모래층을 살짝 건드리며 이동하듯 빛도 사람들의 기억을 스치며 지나갔다. 스치고 난 자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체온처럼 남았다. 오래전 바다를 떠돌던 고래의 그림자가 여전히 지구 어딘가를 떠돌아다닌다는 믿음처럼, 가을 햇살 역시 사라진 뒤에야 그 잔상의 존재가 확인됐다. 빛은 떠나고, 잔상만 남았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도시 온도가 낮아지자 햇살은 마지막으로 길 위에 길고 얇은 흔적을 남겼다. 마치 고래가 수면 위로 떠 올라 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깊은 곳으로 내려가 버리듯, 햇살도 마지막 순간 가장 밝게 반짝였다. 반짝임은 숨과 같았고, 그 숨결은 어둑해지는 골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그 빛의 마지막 떨림을 보지 못하고 각자의 오후를 지나갔지만, 빛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선명한 존재처럼 머물렀다.



가을날의 귀신고래는 그렇게 도시 위를 유영했다. 몸 대신 햇살을 남기고, 울음 대신 금빛을 흩뿌리고, 실체 대신 기척으로만 하루를 통과했다. 누구도 그것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골목 어딘가에서 빛이 갑자기 떨릴 때마다 고래가 지나갔다는 느낌이 잠깐씩 스쳤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그 느낌은 더 선명했다. 빚이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만 존재하는 이상한 생명체. 존재와 부재가 매 순간 겹쳐지는 가을 햇살의 중심에서 귀신고래는.

여전히 더딘 속도로 숨을 쉬고 있었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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