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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나를 통과하지 못하는

사라짐과 존재가 겹치는 순간에 대하여

by 적적


눈이 오더군요.

유난히 조용한 오후였죠.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로 숨은 듯했고, 도시의 모든 소음이

천으로 덮인 듯 사라졌어요.

눈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와요.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냥 하늘이

무심하게 내리는 먼지처럼요.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어요.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눈이 나를 통과한다는 느낌이었죠.



눈 속으로 눈이 들어간 적 있나요.



처음엔 하얀 점 하나가 시야에 맴도는 것 같았어요. 눈꺼풀을 깜빡이는 순간

그 하얀 점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닿더군요. 체온이 남아 있는 속눈썹 사이에서

잠깐 머물다가, 끓어오르던 눈물에 닿았어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녹기 시작했죠.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눈은 녹았지만, 그 녹는 소리는 없었어요. 다만 그 사라짐의 온도만이 남았죠.

너무 작고,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선명했어요.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참 이상하죠.

그건 늘 같은 온도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그렇진 않아요. 어떤 순간에는

뜨겁게 끓고, 또 어떤 순간에는 식어버리죠.

눈송이가 눈물 위에서 녹아내릴 때, 그것이 감정인지 단순한 생리현상인지 알 수

없었어요. 다만 그 작고 투명한 녹은 자국이 무언가의 마지막처럼 느껴졌죠.

눈은 녹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형태를 잃는 거래요.

물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죠. 결국 다시 눈이 되겠죠.

그걸 알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사라지는 것들은 사실 사라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다만 모양을 바꾸는 것뿐이죠.

어쩌면 감정도 그런 게 아닐까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식는다는 건 단순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는 일일지도 몰라요.

눈이 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끝났다’고 부르죠.

사실은 다만 형태를 바꾸었을 뿐인데요.



눈이 내릴 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자세를 취하더군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견디듯 걷죠.

그 표정에는 이상한 평화가 있어요. 눈에 닿는 찬기운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그것에 안도하는 표정이죠.

그건 아마도 멈춤의 감각 때문일 거예요.


세상이 잠시 멈춰 있는 느낌, 시간의 소음이 줄어드는 느낌.

눈은 그런 정적을 만들어주죠. 마치 모든 것이 정화되는 듯한

착각 속으로요.

어떤 날은, 그 착각이 필요하죠.

살다 보면 너무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마음이

산란해지고, 아무것도 집중되지 않죠.

그럴 때 눈이 내리면, 세상이 하나의 속도로 맞춰지는 것 같아요.

그 속도는.... 아주 느..리..고, 차분하고, 그리고 조금은 슬프죠.



슬픔이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슬픔에는 묘한 맑음이 있더군요.

눈을 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슬픔도 결국은 투명한 것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요.

그날 이후로 눈이 내릴 때면 자꾸 눈을 감게 돼요.

그건 피하려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몸의 습관 같아요.



눈꺼풀 위로 떨어지는 감각은 짧고 섬세하죠. 그리고 아주 개인적이에요.

눈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지만, 닿는 온도는 다르거든요.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차갑죠.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의 마음 온도와 닮아 있겠죠.

눈은 늘 제멋대로 오고, 제멋대로 멈춰요.

그 불규칙함이 좋더군요.

예측 불가능한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워요.

규칙적인 건 안심을 주지만, 안심에는 생명이 없죠.

눈은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스스로의 규칙을 지우면서 세상을 덮죠.

그 위에 있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려요. 차와 사람, 길과 인도,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구분까지도요.

눈이 내리면 세상은 경계 없는 하나의 색이 되죠.

하얗다는 건 사실 아무 색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건 모든 색이 섞여 사라진 상태죠.

눈을 보면 마음이 조용해지나 봐요.

너무 많은 색을 가진 세상 속에서, 잠시라도 그 복잡함이 사라지니까요.

모든 감정이 중화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

그건 일종의 휴식이죠.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사..적..인 휴식이요.

눈이 내리던 그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어요.

사람들이 옆을 지나가도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죠.

그냥 눈송이 하나가 눈썹 위에 떨어져 녹는 걸 보고 있었어요.

그 작은 변화가 이상할 만큼 커 보이더군요.



그건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이 한 점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사라짐과 존재가 동시에 있는, 그런 역설적인 순간이요.

눈이 멈추고 나면 거리에는 발자국이 남아요.

누군가 지나간 자리가 금세 드러나죠.

그건 눈의 잔인한 부분이에요.



모든 흔적을 덮는 동시에, 새로운 흔적을 받아들이죠.

그래서 눈은 늘 무정하고, 동시에 너그러워요.

지우는 일과 남기는 일을 동시에 하니까요.

그건 사랑과 닮았죠.



지워야만 남을 수 있고, 사라져야만 이어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눈이 내릴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랑도 결국 눈과 닮았다는 생각이요.

처음에는 예쁘고 부드럽게 내리다가, 어느새 쌓이고, 무게를

갖고, 결국엔 녹아내리죠.

그 과정은 늘 예측 불가능하고, 그래서 아름답죠.



눈이 녹아 사라지는 그 찰나에, 세상은 가장 투명해지니까요.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끝나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더군요.

눈은 그걸 가르쳐줘요.

사라짐의 미학, 멈춤의 아름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의 평화.



그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필요한 시간이에요.

모든 것이 너무 뜨겁고, 너무 빨리 식어버리는 세상에서

눈은 유일하게 서늘하게 뜨거운 존재더군요.



혹시 눈 안에 눈이 들어간 적이 있었나요.



그 순간의 차가움을 아직도 기억하나요.

그 하얀 점 하나.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멈추게 했는지.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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