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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흔적의 숲

아직 이름이 없는 감정이 머무는 곳.

by 적적


문자 앞에 붙어 있던 숫자가 끝내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아침까지도 그게 계속 떠올랐어요. 왜 그런 건 잘 안 지워질까, 그런 생각이요.

아마 사라지지 않아서 더 불안했던 거겠죠.



종이에 베인 상처를 보면 종종 그 검도장 장면이 떠올라요.

진검을 단단히 쥔 사내와 그 앞에 서 있던 볏단.

아무 소리 없던 순간에 칼날이 스쳐 지나가죠.

마치 이쪽에서 저쪽으로 선을 넘는 것처럼요.

그런데도 볏단은 베어진 줄 모르고 그대로 서 있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지죠.

그 잠깐의 공백이 이상하게 오래 남아요.

이미 파열은 일어났는데, 인식은 느리게 따라오는 그 시간요.

사랑도 그렇고 기억도 그렇고요.

늦게 무너지는 게 세상의 방식이잖아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꼭 남아 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지워지지 않으려는 어떤 기척에 가까운 것 같달까요.

흔적은 흔적대로 버티고, 감정은 감정대로 남고.

누군가는 집착이라 할 테고, 누군가는 추억이라 부르겠지만

사실 다 비슷한 얼굴이죠.


스마트폰에서 몇 년 전 사진이 뜨면

그때 웃던 사람은 이제 없다는 사실이 먼저 떠올라요.

그럼 그 미소는 뭐로 남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죠.

빛의 잔상인지, 감정의 그림자인지.

삭제되지 않은 건 기억 속에서도 공간을 차지해요.



어쩌면 사람은 잊기 위해 더 많은 걸 기억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넘쳐버린 기억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망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요.

근데 그런 건 대부분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양으로 남아요.

불안이라든가, 몸에 새겨진 감각 같은 형태로요.

완전히 지나간 일인데도 때때로 흔들리는 이유가 아마 그거겠죠.



가끔 어떤 사람의 손목이 떠올라요.

별 의미 없던 순간인데, 그 온도가 이상하게 오래 남아요.

그건 기억이라기보다 감각의 잔향에 가까운 거죠.

감각은 원래 잘 안 사라져요.

언어보다 오래가고, 거짓말도 못 하잖아요.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거겠죠.



사람이 다 잊었다고 해도 몸이 기억한다는 말 있잖아요.

불안도 대체로 그 기억에서 올라오고요.

손끝이 이유 없이 떨리는 날이라든가,

공기의 냄새가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 같은 것들요.

그게 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의 신호죠.

사라지지 않는 것엔 늘 두 가지 감정이 붙어 있어요.

안도와 불안.



남아 있어서 다행인데, 남아 있어서 불편한 그런 느낌요.



누군가는 오래된 사진을 못 버리고,

누군가는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누군가는 메신저 창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죠.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겠죠.

완전히 사라지면 괜찮아질 텐데

어정쩡하게 남아 있으니까요.



밤이 되면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 더 선명해져요.

어둠이 빛보다 오래 기억하니까요.

다 나은 상처가 가려울 때가 있죠.

그게 완치가 아니라 기억이 올라오는 거겠죠.

상처는 모양만 바뀌지, 정말로 사라지진 않는 것 같아요.



사라지지 않는 건 결국

존재가 계속 증명되려는 시도 같아요.

사라질까 봐 두렵고,

사라지지 않을까 봐도 두렵고

그 모순이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죠.



아침 무렵 다시 그 검도장이 떠올라요.

칼날은 지나갔는데 볏단은 아직 그대로 서 있는 그 순간.

짧은데 길고, 고요한데 불안한 그 순간요.

사랑의 여운도 비슷하잖아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그 정적이 묘하게 아름답고요.



불안이 그 아름다움의 다른 얼굴 같기도 하고요.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삭제되지 않는 문자, 버리지 못한 이름,

지워지지 않는 감각, 내려놓지 못한 마음.

그게 사람의 내부를 조용히, 꾸준히 이루는 거겠죠.

사라지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랄까요.

그 불안 없었다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고요.



사람은 결국 그 불안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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