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고아 아기곰이 "위니 더 푸"가 된 사연
테리 팍스를 만난뒤 마라톤이란 단어가 낯익어가는 중인데, 마침 마라쏜(마라톤? Marathon)이란 마을을 만나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마라쏜 동네로 들어가는데, 안개가 끼고 날이 차갑다. 여름에서 갑자기 초겨울 날씨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여장을 풀기전, 식당에 들렀다 가자고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모텔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므로. 모텔에 들어가 방을 예약하면서 가까운데 식당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국음식점이 바로 길건너에 있다고 알려줬다.
입맛에 까다로운 막내가 이날 음식에 대해서 대단히 호평하였다. 더불어 중국식당에서 서빙하는 백인 아주머니의 무심한듯 활발한 그 태도는 누구나 긴장감을 조금씩 내려놓게 할만 했다. 그리고 음식맛을 잘 모르는 나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목이 조금 따끔했다. 이것이 무슨 증조일꼬, 속으로 불안해졌다. 아주 조용히 사람들과 부딪치지 말고 거리를 두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텔을 경영하는 이들은 식당을 함께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추측해본다. 호텔내에는 오로지 중국 식당 메뉴만 있어서, 모텔에 들르는 손님들이 아주 많이 그곳을 이용할 것 같았다. 식당 접수하는 아가씨가 중국인이기도 했다.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니, 냉장고에 일일분씩 음료수, 바나나, 머핀 등이 포장되어 있었다. 팬데믹때 생겨난 아이디어로 보인다. 식당에서 누구와 부딪치면서 먹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그렇게 나선 길에 아주 잠깐 시간을 보낼 곳이 나왔다. 바로 어린아이들에게 유명한 위니 더 푸 공원을 만난 것이다.
"1914년 8월 24일 아써항을 떠났다. 기차에 하루종일 있었다. 곰을 20달러에 샀다."라는 글이 해리(Harry Coleborne) 중위의 일기에 쓰여있다.
세계1차 대전이 일어나 영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자신의 고향 위니펙에서 떠나 토론토로 기차로 가는 길이었는데, 중간 작은 마을 하얀강(White River)이란 곳에 다다라, 기차가 잠시 쉬었다. 해리 중위는 사냥꾼이 아기곰을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아기곰이 불쌍하게 생각됐던 중위는 20달러(아마도 그때 화폐로는 꽤 큰 금액이었을 것같다)에 샀다. 해리 중위와 함께 여행하며 군대내의 애완동물이 된다. 그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생활했지만, 그해 12월 프랑스로 전역명령을 받게 된다.
해리는 이 아기곰을 런던 동물원에 맡긴다. 더이상 데리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위니펙이라 불리던 이 아기곰은 차자 "위니"로 불리며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게 된다.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던 위니는 엄마 곰이 죽은 뒤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에게 가족같은 느낌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싶다.
해리가 런던 동물원을 나중에 방문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있는 위니를 캐나다로 데리고 갈수 없음을 알고, 그 동물원에 완전 기증한 것이 1918년이었다.
위니가 세상속으로 걸어들어온 데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이 런던 동물원을 자주 방문했던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버지 A.A. Milne씨.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물원의 위니를 자주 찾았던 그는 그의 아들과 위니와의 우정과, 아들이 갖고놀던 곰인형을 포함 다른 동물 인형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림은 Ernest Shepard가 그렸다. 그것이 지금 많은 책으로 나왔고, 디즈니랜드에서 만들어내어 유명해진 위니 더 푸 이야기다. 위니에서 이름이 위니 더 푸가 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크리스토퍼가 그렇게 불렀다고 알려졌다.
화이트 리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내용을 알지 못하다가 1980년 처음 이 사실을 알아내곤 위니 더 푸 동상과 공원을 만들고, 매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진짜 위니 곰은 암컷으로 동물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놀고, 먹는 것을 나눠먹으며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20년을 살고 죽을 때 신문에도 나는등 유명했다고.
전쟁하러 가는 군인이 곰을 샀고, 그 곰이 부대의 애완동물이 되고. 상상이 잘안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의 낭만을 조금 짐작해 볼수 있겠다. 아니면 이 중위의 직책이 꽤 높아서, 그 정도의 일은 직권으로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스를 넣을 때면 막내는 함께 내려, 차 통유리를 닦곤 했다. 처음엔 남편의 부탁으로 했지만, 나중에는 자동으로 내려서 도와주곤 했다. 달리는 차에 부딪쳐죽은 벌레들의 혈흔을 닦아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 일을 나는 한번도 하지 않았으니, 딸의 투정에 대해서 가끔 하소연하는 내가 사실은 가장 대접받았던 것이 아닌가싶다.
마라쏜을 지나면서부터는 풍경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5대호 중, 가장 크다고 고등학교때 배운 기억이 나는 슈피리어 호수를 끼고 차가 달린다. 물과 산과 바위, 그 모든 것들이 다 눈길을 끈다. 다음 도시는 수센 마리로 들어간다. 이 지역들은 자주 차를 세우고 싶은 구간이 많았다.
수센마리까지는 우리 가족이 한번 올라와봤다. 아이들이 틴에이저였을 때, 엄마를 모시고 캠핑을 왔던 곳이기도 하다. 팬케이크를 닮았다고 해서 팬케이크 베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온타리오 공원에서 캠핑했었다. 그때 엄마가 이쁘다며 몇뿌리 캐온 그 꽃을 만났다. 엄마가 많이 생각났다. 이 꽃은 이전에 살던 집에 심어놨는데 아마 지금쯤 같은 꽃을 피웠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