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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Aug 09. 2022

테리 팍스를 만나다

캐나다의 영웅, 그의 마지막 정거장 썬더베이

이번 글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새롭게 만나게 된 그사람, 그 청년 그 이야기에 온 지면을 할애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열심히 달려서 위니펙을 지나 드디어 온타리오에 들어섰다. 트랜스 캐나다 1번이 17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집에 다 온듯 마음이 놓였다. 공기가 달착지근하다. 들어보지 못한 도시, 그러나 꽤 큰 도시로 보이는 Kenora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다. 석양에 마을모습이 아름답다. 



미리 전화로 예약한 Days inn 모텔에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호텔방에서 이젠 즐거운 쉼이 있겠구나 하면서 저녁을 어떻게 할까, 피자를 먹을까 했더니, 막내가 자신은 호텔에 있겠다고 나가서 먹고오라고 했다. 어쩌면 그때 아이를 홀로 있게 놔두고 우리끼리 나갔다 왔으면 조금 나은 상황이 되었을 것같다.


고락을 함께하는 한팀이라 생각했고, 같이 나갔다 오자 그랬더니, 쫓아나오긴 했는데, 차를 타자마자 다시 내리겠다고 했다. 다짜고짜 내리겠다니, 저녁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계획도 없이 갈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이는 갑자기 어떤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할때가 있어서 당황하게 한다. 아직도 아이를 읽어내지 못하는 우리는 차에 탔다가 출발하자마자 내려달라고 하는 그 아이를 일단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기는 했다. 


우리끼리 저녁을 해결하는 것도 그렇고, 피자 주문은 막내의 담당인데 어쩔줄을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참으로 대단한 따님이네, 엄마 아빠를 이렇게 대접하는게 맞는가, 하면서 한숨을 쉬어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딸의 ADHD는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때가 많다. 타협과 이해가 없이 자신의 기분대로 마음의 문을 닫는다. 남편은 그런 딸에게 전화를 건다. 피자집을 찾아 조금 다니다가 도로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컵라면이라도 먹어야 하나, 막내가 빠진 상태로 저녁을 먹을 수는 있겠나, 심난해진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잊었다. 피자를 주문하면 어떻겠느냐고, 주문은 당연히 딸이 맡는다. 밤늦은 시간  피자를 주문했는데, 무엇이 있네 없네, 몇번의 통화가 있은 후에도 배달이 오지 않더니, 배달 착오가 있었다고 연락이 왔다. 데이지 인이 두개의 동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배달이 왔는데 10시가 훨씬 넘었던 것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딸은 숙소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전화하면서 쉬려고 했는데 다시 나가자고 해서 화가 났었던 것 같다. 피자집에 가서 기다릴 그 시간을 참을 수 없고 말이다. 주문하면 될텐데, 엄마 아빠는 주문할 생각은 않고 나가자고만 하니, 설득시키기 보다는 짜증부터 냈던 것같다.


그러고보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오면, 어딘가로 사라져서 긴 전화를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부모와 나누는 것의 하루치 한계에 부딪쳤었다고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생각일뿐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짐작하기는 쉽지않다. 



그 다음날, 그 마을의 아름다움도 다시 보고, 아침밥을 먹자고 길을 나섰는데 새벽에 보는 케노라는 조금 불안했다. 거리 구석진 곳에는 대여섯명의 인디언들이 바닥에 앉아있는데, 그 모양이 밤새 밖에서 보낸듯하다. 말하자면 마약쟁이들 같아 보였다. 호숫가 쉴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그냥 길을 떠나기로 했다. 멀리서 보는 모습과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어디나 있는 모습이긴 하지만 씁쓸했다.


17번을 타고 달리다 보니, 썬더베이(Thunder Bay)에 다다랐다. 조금 쉴겸 인포메이션 사인을 따라 갔다가 바로 그사람을 만나게 됐다. 살아있다면 나보다 연배였을 1958년생 테리 팍스를 말이다.


그는 캐나다의 영웅이다. 캐나다에 살면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나도 이름만 들었을뿐 그의 삶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겨우 22살인 1981년에 죽었다. 


1977년 3월에 전이성 골육종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그는 운동선수였으며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장애인 운동 대회등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을 비롯한 암환자를 위해서 기금마련 마라톤을 하기로 계획한다. 1979년 캐나다의 동부끝, 뉴펀들랜드에서부터 서부 끝, 브리티쉬 콜롬비아까지 마라톤으로 횡단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이 희망의 마라톤에 캐네디언들에게 1달러씩 후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낀채로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는데, 암이 재발하여 더이상 뛸 수 없게 된 곳이 온타리오 Thunder Bay였던 것이다. 이 썬더베이에는 테리 팍스를 기념하여 동상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Marathon of hope"........기념탑에 붙어있는 흰나방들. 우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테리의 본명은 테란스 스탠리 팍스이다. 그가 달린 총 거리는 5,373km 였고 총 143일간 달렸다고 나와있다. 온타리오에 들어서면서 테리 팍스가 미디어에도 많이 노출되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썬더베이에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암이 재발했고 이후 브리티쉬 컬럼비아 병원에서 9개월후 운명을 달리한다. 

그후로 "테리 팍스 런"이라는 공식적인 자선행사가 캐나다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생겼고, 그 돈은 고통을 받았고, 받고있고, 받을 암환자들을 위한 치유기금으로 사용된다. 물론 이 기금의 혜택으로 많은 사람이 병을 이겨냈을 것이다. "테리 팍스 런"은 전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시행중인데 그 나라들의 이름중에 한국은 빠져서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달려온 길을 향해서 테리는 달릴 참이었다. 우리는 차로 달려왔을 뿐인데도 힘들다며 헉헉대는데, 그는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정해진 분량을 뛰었다. 그것도 의족을 한채로. 조금 부끄러웠다. 그가 뛰어온 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더이상 의미없거나 지루한 길이 아니었다. 동서를 잇는 트랜스 캐나다 고속도로의 어느 구간은 테리 팍스 하이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다.


테리 팍스 런은 개인과 단체등이 조직해서 운영할 수 있다고 한다. 매년 8월 첫째주 월요일이 테리 팍스날로서 온타리오는 시빅할라데이로 공휴일이다. 테리 팍스 런은 각 지역마다 학교마다 개별적으로 열고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온타리오 오웬사운드도 해리슨 공원에서 올해는 9월에 열린다고 되어있다. 한 개인의 희망이 모두의 희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그는 자신의 짧은 삶을 어떻게 그렇게 활활 불태우며 살수 있었는지. 누구나 그렇게 살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주어 이렇게 남은 자들에게 큰 빛이 된다.


막내는 테리팍스 동상에 있는 하얀 나방을 내게 보라고 했다. 나방이 이쁘기는 힘든데, 그 석탑에 앉은 흰나방들은 좀 특별했다. 그곳에만 있을 것 같은 나방의 모습이었다고 할까. 호수가 보이는 언덕에 있었던 그 썬더베이, 공원... 그저 길을 달리다가 또 우연히 젊은 테리를 만나, 긴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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