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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mien We May 15. 2022

Sati를 외친다는 건

분노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산다. 아침부터 열받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슬픈거나 억울할 수 도있다. 매번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불편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지난 일요일의 시작은 이랬다. 이틀 전 어버이날 내려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어머님께 용돈을 보내드렸다. 용돈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했다. 그 동안 머리 속에 있던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장모님께도 용돈을 넣어드려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와이프는 슬픔 어린 분노를 나에게 표현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더 이상 생각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나라는 인간이 약간 싫어졌다. 이 정도도 핸들하지 못하다니...


뭔가 해결나지 못한 마음으로 동네 목욕탕에 갔다. 사실 내 성격이 좀 깐깐해서 그런지 난 목욕갈때 상당히 작은 파우치(뒷주머니에 들어간다)에 칫솔, 타월, 손톱깍이, 줄 등 다양한 용품을 넣어간다. 제일 싫은 건 목욕탕에서 파우치가 물에 젖는게 싫다. 그래서 수건으로 파우치를 감싼 후에 목욕탕 열쇠고리와 목욕용품을 대야에 넣고, 마른 수건으로 파우치를 싸서 목욕탕 세면대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열탕에 들어간다. 몸을 한동안 데운 후 씻으러 자리에 오는게 보통 일주일을 마감하는 목욕의 루틴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루틴으로 열탕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어느 배나온 60대 아저씨 한명이 내 대야를 치우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그런거지? 왜? 내 대야를 주변 세면대가 다 비었는데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비우는거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치우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돌아오는 건 욕지거리. 니가 뭔데 지랄이야? 니가 뭔데 공중목욕탕에서 원래 이런 걸 모르는 거야? 말이 돼? 너 정신병자야? 


나는 분노했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자리를 빼시라구요. 왜 함부로 치우시는거에요? 그는 지속 화를 내면서 자리 두개의 세면기를 다 쓰기 시작했다. 한 육십세 정도로 보이는 이상한 아저씨는 결국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억지를 부려놓고,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에서 쾌락을 얻는 것 같았다. 물론 더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가끔 살인사건이 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화를 좀 내려놓고, 한동안 안자있다가 다시 열탕에, 냉탕에 들어갔다. 마스크 사이로 나오는 습기가 안경을 가득채웠고, 머리 속에는 계속  이런 저런 잡 생각이 떠올랐다. 싸워? 말어? 떨리나? 싸우는게 의미가 있나? 덩치큰 젊은 놈이었어도 내가 화를 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요즘 읽고 있는 Clean이라는 책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스스로가 맞다는 생각에서 분노는 출발한다.
그랬다. 나는 공중목욕탕에서 남의 대야를 함부로 치우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노의 원리가 나에게 해결점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을 계속하면 분노가 초과될 것 같았다.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순간의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어느새 안경에 습기가 찰 정도로 탕 수면 바로 위에 있는 내 코와 마스크사이의 공기는 안경을 진하게 칠했다. 약간 맑아졌다를 반복했다. 자연스럽게 시야가 안경에 고정되면서 그걸 반복한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 덜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틀렸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노는 내가 틀릴수도 있다로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중도덕인데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올라왔다. 늙은 세대들의 강짜부리기도 같이 연상되면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단지 온전히 나의 선택사항이었다. 화를 내고 문제를 만들것인가 말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냥 참는 것이 방법인가? 이렇게 되면 또 나중에 기억이 나면서 분노가 치솟아 오를텐데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럼 도대체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처리할 수 있는가? 
클린이라는 책에서는 'Sati'를 하라고 한다. 이게 전 세계에 거의 유일하게 분노를 잠재우고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Sati란 다른 말로하면 Labeling이라고 한다. 끈임없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이름표를 붙히는 작업이다. 숨을 들이 마신다. 내뱉는다. 내가 화가 나고 있구나. 내가 분노하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냉탕에 앉아서 코만 내어놓고 숨을 쉰다. 김이 안경에 서린다. 숨이 잘 쉬어진다.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몸을 통해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이제 열탈에 가려한다. 몸을 움직인다. 열탕에 들어갔다. 감각이 살짝 느려지는 느낌이다. 분노했던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다시 생각해도 굴욕적이다. 화가난다. 다시 숨을 쉰다. 반복한다. 여기서 화를 내면 오늘 오후 전체가 망쳐지는 하루가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이유로 분노한다. 분노한 스스로가 싫다면, 슬픈 스스로가 실하면 거리를 두어야한다. 스스로와 거리를 두어야한다. 그 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Sati다. 


내가 내가 아닌 듯, 상대가 상대가 아닌 듯, 움직여지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그 순간만 존재하듯이 다가가야 스스로와의 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서 계속 되뇌인다. 손가락을 움직인다. 눈을 깜빡인다. 등을 곧게 핀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내 것이라고 느껴지는 내 몸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또 망상이다. 그런데 도움이 된다. 거창하게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라벨링을 하며 내 감각에 집중하고 감정은 지워버린다. 그리 큰일도 아니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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