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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23. 2024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너무나도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마르코복음 3장 21절, 새번역성경)* 



사실 그분이 미쳤다고들 말하고 있었다.

(마르코복음 3장 21절, 200주년기념신약성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한 것들 가운데 

맨처음 쓰여진 복음서는 마르코복음이다. 

마르코에 의한 거룩한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형식과 내용을 참고한 대체불가한 본보기이다. 

그리고 가장 담백하다. 

흔히 전통은 네 개 복음서와 저자에게 상징 존재를 대입했는데, 

마르코복음과 마르코복음사가에게 주어진 영예는 ‘사자’이다. 


사자의 복음서, 

사자와 같은 복음사가. 


가장 당당하고 

그래선지 가장 담백하다. 

문장도 내용도 구성도 담담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루카복음의 부드러운 문체나 

요한복음의 깊고 그윽한 사색, 

마태오복음의 인간적이고 성실한 느낌 들도 좋지만 

마르코복음의 담백한 문체에 깊은 위안을 얻는다. 

마치 낮고 빠르고 또렷한 음성이 청자에게 확신을 안겨 주는 것처럼 

마르코복음의 어조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물론 지성은 꺼진 게 아니어서 

이게 무슨 말일까, 이게 말이 되나 하며 듣는 부분도 있지만 

마른 땅에 비가 듣듯 

이미 말씀은 안에 스미고 있다. 



이 마르코복음이 예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온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친척들은 여간 걱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여럿이 찾아온 건 안부나 연락을 주고받으려는 게 아니다. 

여차하면 사지를 들어 옮길 작정인 것이다. 

혹시 힘이 필요할 수 있으니 

동행 한 명 한 명이 일손인 것이다. 

그들은 낯익은 이를 타자로 취급하고 있다.

마음이 이미 그렇게 설정된 채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 생각은 여정 동안 눈덩이 구르듯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예수의 반대자는 어디 멀리 있지 않다. 

그를 가장 오래전부터 알아온 이들이 

그를 ‘만나는’ 대신 그를 판단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당신을 알지만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당신을 안다고 생각하고 

당신도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뿔싸, 착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으로 당신을 묶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잊지 않는 정도뿐. 

우연히 거리의 벤치 앉다 어깨가 닿은 

일생 처음 만났고, 다시 만나지 않을 낯선 저이보다 

조금도 더 잘 알지 않는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 대한 대응 전략, 그대에 대한 내 입장만 정하고 알아 두었을 뿐이다. 

나와 떨어뜨려 독립된 당신을 안다면, 

나는 매번 당신을 만나는 일이 낯설고 설레고 신기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정말로 

독립한 한 사람이란 걸 알 때 

나의 기대나 소망 때문이 아니라 

나의 두려움과 호소 때문이 아니라 

그와 다르게 

자기 자신의 이유로, 어쩌면 소명, 어쩌면 희망대로, 어느 만큼은 그때 그때의 자기로서 

나를 채우기도, 비우기도, 

맞기도 빗나가기도 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렇게 알 때 나는 당신을, 우리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마르코복음은 실제로는 조금 더 길지만 

본래는 아래 부분에서 끝이 난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코복음 16장 8절, 새번역성경) 


여자들은 밖으로 나와 무덤에서 달아났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너무나도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코복음 16장 8절, 200주년기념신약성서)**




그렇다, 우리는 서로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너무나도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똑바르게, 참되게, 진실로, 가치 있는 무엇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절됐다. 

말하는 자는 미친 자다. 


그게 세상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우리가 말해야 한다고. 

당신의 빛나는 침묵은 말을 배고 있어서 아름다운 거라고. 


그러니 말이 태어나게 하라고. 

옹알이로, 밀기와 뒤집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온전한 말을 하라고 


우리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그럼 우리는 

무섭지도 

미치지도 

않을 테니.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연중제2주간 토요일 복음 

**성서연구자들은 통상 마르코복음이 본래 이 문장으로 끝났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16장의 남은 부분은 후대에 가필(加筆)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경이 단일 저자에 의한 작품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저작이라는 면에서 

더하여 복음사가는 기자처럼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쓴 것뿐, 

성경은 하느님 자신, 성령이 저자라는 종교적 믿음 안에서 

이러한 가필이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맨처음 복음사가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첫 번째 복음서가 마르코의 이름을 빌어 쓰여질 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대한 메시지가 전해지고 

사도들과 교부들의 활동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사가가 ‘빈 무덤’ 사건 이후 전개를 모를 리 없다. 그러니까 그는 이 뒷부분을 

‘고의로’ 빠뜨렸다. 

무지에 의해서나 의심 때문이 아니라 ‘불필요하고’ 뺌으로써 얻는 더 큰 ‘선익’이 있다고 여긴 것이 틀림없다. 복음서가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 할지라도 분명 매우 ‘의식적’인 저작이고, 복음 선포라는 목표 또한 다른 복음서나 서간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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