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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16. 2024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 죄인을 부르러 왔다.



잘생긴 젊은이였다.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사무엘기 상권 9장 2절)





누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잘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간혹 부러움이 사랑을 넘어선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필요하고 

실제로 탁월한 경우도 많다. 

그들은 덜 비뚤어졌고 

덜 꼬여 있기 쉽다. 

꼭 쉬워서가 아니라도 

그들이 누린 복은 

주변으로 흘러넘칠 만하다.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누가 보아도 나쁜 사람 

섞이지도 닿지도 않으면 좋을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 사람이며, 

그것을 나는 어쩌지 못한다. 

내가 절망하든 말든 

그가 그러한 걸 어찌하랴. 


그런데 그런 사람만 골라서 부르면 어떡하나. 


애초에 모두가 부르는 이는 

일부다처의 알파 메일로 

강고한 왕국의 여왕벌로 군림하고 전횡할지 모르나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는 

정말로 모두를 필요로 하여 

모두에게서 가치를 드러낸다. 


모두를 구할 사람은 

와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꼭 그런 것들만 주워 간다. 

그의 수확 방식은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논란을 떠나 경탄할 만한 것이 분명하다. 

논란은 컸다. 

그는 못박혀 죽을 때까지 

숨을 헐떡이다 끊길 때까지 

두 손목과 발등을 뚫어 꿰찬 쇠못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다음 논란은 더 크다. 

패배자들, 탈락자들이 연대하여 

괘씸하게도 웃는 낯을 보였다. 


반듯한 청년 사울을 

왕으로 앉혔던 구약의 신은 

왕권을 지닌 외아들을 

완전히 신분 세탁한 모양이다. 

생김새뿐 아니라 

살아가는 꼬락서니를 딱 그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에 달렸다. 


하지만 그가 

저항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수락하여 

수난하였으므로 


이 상징은 전복되었다. 


그는 이기는 대신 

지고, 대신 

폭력의 고리를 이어가지 않음으로써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보임으로써 


사랑과 혁명을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역겨운 일이지만 

거룩하고 달콤하다. 



죽음을 빨아들여, 죽음으로 겹겹이 덮인 상징은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지렛대가 되었다. 

천국에 갈 것 없이 

천국이 지상에 내려 덮어써 버렸다. 

어떤 반론도 듣지 않고 

어떤 저항도 상대조차 하지 않고. 


생명의 샘이 솟았다. 



쓸모없는 자는 

은총을 드러낸다. 


가장 큰 쓸모를 뽐내는 누구도 

다른 모두를 값지게 살리지 못했으나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밑바닥 생은 

모두를 돌보고 모셨다, 들어높였다. 


장난 아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복음 2장 16절과 17절)**




그이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도 

명백히 

배타적 우선성을 띠고 

필요하다. 


목숨이 달렸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말씀 가운데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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