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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Jan 09. 2024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를 생각하며

— 그에게는 처음이 아니다


한동안, 어쩌면 조금은 지금도

유행하는 말이 떠오른다.

"~은 처음이라"


엄마인 것은 처음, 연애는 처음, 결혼은 처음,

이번 생도 처음....


그것은 우리가 단단하게 '개인'을 세운 결과

개인을 무너뜨리고 기어코

'개인의 죽음'을 초래하였음을 상기시킨다.

이미 지난 세기부터 반 세기 넘도록

수많은 현자들이 공공연하게 진단하고 경고한 바이다.

그들은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하였지만

승리가를 부를지, 패자와 망자를 위한 진혼곡을 부를지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

1단계 앞에는 늘 0단계가 있다. 영점을 맞추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스테파노는 첫 순교자이다.

사도행전의 이 기록은 교파 불문, 종교 밖 역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 전에는 순교자가 없었으니까.

스테파노는 "순교는 처음이라..." 되뇌었을까?

그래서 그는 힘들었을까?

죽음을 향한 돌진, 또는 수용 중에

이 적극적인 수동태는 여러 궁금증을 일으키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첫 순교자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그가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면

순교는 기념할 만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써 기억하거나 거기서부터 얻어낼 게 없는

무의미, 허무 자체일 것이니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여진다.


그는, 자신을 첫 순교자로 여기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정말 첫 순교자라면 스테파노교가

그리스도교 대신 생겼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첫 순교자로 여겨

자신을

뒤따르는 그림자로 여기지 않았을까?


어려운 게 없다.

그림자는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흔들릴 게 없다.

몸이 흔드는 대로 춤추지만

다른 무엇도 그림자를 흔들 수 없다.

나는 그의 흔적이다.

나는, 이것은

부득이(不得已)하다

그리 믿지 않았을까?


부득이한 자유.


그러고 싶다면 도파민 분비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없듯이

정말로 그렇게 느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웅적 순교는

하느님의 행위요, 하느님이 베푸는 은총이다.


그래서 순교는

다른 아무런 조사 없이

순교함이 사실인 이상 자동으로

천국 인증, 성인 인증이란다.


그가 받은 피의 세례는,

몸을 입은 이들이

성령으로 세례받았음을, 불의 세례를 받았음을 확증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이 아니다.

억겁을 이어온 생의 연속체

그 한 몸뚱이일 뿐이다.

만일 죽음이 정말 죽음뿐이라면

온세상은 시체더미일 뿐

이 검은 겨울 뒤에

어떤 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봄은 오고

흙더미에서

썩은 시체에서

생명은 돋아났다.

형태를 바꾸고

간격은 있지만

그 거리를 뛰어넘어

생명이 내내 존재한다.

폭풍 위로 평온하게 해가 비치듯

늘 그랬듯.


이 지평은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있다고 증명하기 전에 아무도

어떤 방식으로도

없다고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긴긴

영속한 성공의 작은 연장(延長)일 뿐이다.


어려워 말자.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못할 일이라거나


달리 어쩔 수 있을 거라는

거짓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우리는 산다.

부득이를 산다.

이것이

사유(事由)나 이유(理由)를 넘어서는


우리들의

자유(自由)다.


어쩔 수 없지 뭐.

자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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