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너에게 말한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마르코복음 5장 23절)
애원한다.
아비의 하는일이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르코복음 5장 35절)
만류한다.
아비가 희망하지만
이웃은 냉정하다, 합당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코복음 5장 36절)
도전한다.
믿는이에게도, 이미 믿고 있는 사람에게도 도전은 주어진다.
필요하다.
다만, 믿는이에게 도전은 계속 ‘행위’할 것을 주문할 뿐이다.
그렇게 들린다.
그렇게 들을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여진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마르코복음 5장 39절)
도전한다.
믿지 않는 이도 도전받는다.
상식은 늘 의심받는다.
어떤 의심은 해롭고
어떤 의심은 이롭다.
결핍과 초과. 차거나 뜨겁거나.
중간은 없다.
미지근하면 뱉는다.
모든 도전은
재정의(再定義, redefinition)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잠든 것’이다.
전자는 종결되어 덮는 것이지만
후자는 진행 중인 사건으로 활동한다. 세계-를-향해 열려 있다.
열어야 시작된다.
덮어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마르코복음 5장 40-42절)
이제 믿지 않는 이들은 내쫓고
믿는이들은 초대한다, 동행한다.
영광은, 신비는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만 허락된다.
예수는 육신으로 와서 내쫓고-데리고 들어가지만
영을 머금은 자연은
내쫓긴 줄 모르고 쫓겨나게 두고
초대받은 줄 미처 모른 채 그 앞에 서게 한다.
모든 사건은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지만
우리는 그때서야 혹은 한참 뒤 돌아보고서야
아!
외마디를 지르며 깨닫는다.
그리고 하는 일은 단순하다. 빤하다.
일어나렴, 도로 깨어서 살아가렴.
그리고 일어나는 일은 단순하다. 빤하다.
일어서서, 걸어다닌다. 곧바로.
이 모든 일에는 사이가 없다. 곧바로. 앞과 뒤는 쪼갤 수 없다.
동전의 앞뒤처럼
주머니의 안과 밖처럼
그것들은 구분하지만
엄밀하게 하나다. 한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마르코복음 5장 43절)
그러나 마지막 때에 이르러
감추었던 모든 것은 드러났다.
우리는 큰소리로, 혹은 낮은 목소리로라도
쉬지 않고 이야기한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한다.
전에는 감추었던 것을 말한다.
그래도 듣는 이는 듣고, 듣지 않는 이는 듣지 않는다.
그들은 들리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이토록 큰 신비뿐 아니라
작은 신비들, 진심이라거나 진실을 고하는 간단한 일들도
눈감고 귀 막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교실에서
광장에서
저잣거리에서
저마다 마음 안 골방에서조차.
그러니 당신이
저 소녀를 알거든
먹을 것을 주라.
기적이 계속 살아가도록
그 소녀가
당신 몸의 문턱 안에 있든지
당신 몸의 문턱 바깥에 있든지
먹을 것을 주라.
모든 거룩한 것들에게
합당한 생을 계속해서 주어라.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