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에 숨은 것들
태극기는 일개인, 무자격자가 공론도 없이
타국에 가는 길에 임의로 배 위에서 급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만
정식으로 쓰이게 되었죠.
가끔 그런 일이 있습니다.
태극기에 담긴 음양과 팔괘의 사상
주역이 이끄는 변화의 이치
다 좋습니다.
시각적으로도 직관적이고
담긴 이야기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더 내가 좋아하는 건
이렇게 중대하고 귀한 일이
우연히 벌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일어나다 만 게 아니라
끝까지 가서
온 땅을 뒤덮고, 온 마음에 스미었다는 겁니다.
이 깃발은 나라를 잃고도 나라의 상징이었고
피가 묻고 때가 묻어도 고결하고
존귀하게 간직되었습니다.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의미 있었고
모두를 이어 주었으며, 그러므로 손대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
무수한 인생을 바꾸고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생명을 오롯하게 다시 바친 일도 많습니다.
나는 우연 뒤에 숨은 것이 필연일 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궁금합니다.
몇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지 우연이었고
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죠.
당신과 내가 또 저이가 무슨 영문인지
한 마디 나누지 않고도
그렇게 했습니다그려.
모두가 관여했지만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했다 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보다 크지 않으니까요.
아이를 안는 부모의 마음이 비슷할까요?
열다섯에 교과서의 태극기를 오려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문방구 아저씨가 신기해하며 값을 받지 않고 코팅해 주었지요.
애국?
열광?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멀리 있습니다.
어떤 집단과도 자신을 동화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교’ 같은 말, ‘우리나라’ 같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우연에 필연이 숨어들 때
아니면 우리가 거기다 필연을 숨길 때
여기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운명’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운명을 사랑합니다.
만들어진 영원을
Amor fati.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