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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월 Feb 23. 2024

손으로 쓴다는 건

— 종이와 연필, 만년필




손으로 쓴다는 건 매력적이다.



유용성이라는 점에서의 가치는

과학이 이론의 여지없이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타이핑을 하는 때에 비하여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뇌 신경망을 몇 배나 활성화시킨다.

그 매순간의 차이는

누적돼서 건널 수 없이 엄청난 격차를 벌린다.


독서가

무언가를, 이를테면 크든 작든 [보는 쪽의] 몸과 [보이는 쪽을 향한] 초점을 고정한 채

‘보는’행위에 비하여

뇌를 크게 활성화하듯.

그래서 독서 아닌 보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뇌신경망을 쇠퇴시키고

특히 전두엽을 파괴해

언어능력, 공감능력, 연쇄해

작업 사고 능력까지도 떨어뜨린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점자책이든)

감각을 활용하는 활동일 뿐 아니라

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하고 상상하여

재구성하는 고도의 정신 노동이기도 하고, 그래서 운동이기도 하다.

피로하고, 보람을 주는 일이며

할 때마다 실제로 물리적인 뜻에서도 ‘나’를 내 ‘몸’과 생명활동의 ‘방식’을

바꾸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쓰는 것에서도

손으로 쓰는 한

그게 딱히 종이여야만 하지는 않는다.

유용성만을 따진다면.


그러니까

태블릿 피씨의 모니터에

스타일러스로 슥슥 긋고 쓰는 것도

뇌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에 쓴다는 건 무슨 일인가.

종이에 펜으로

연필, 만년필, 붓 같은 것으로 쓰는 일은

아니면 천이나 유리, 다른 가능한 표면들에

무언가 쓴다는 건 뭐가 다른가?


최소한, 기본으로 간주되는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처음에는 양피지, 목간, 점토판, 바위 등 얼마나 많은 소재를 동원했던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여러 가지 이유로 선택하고

이제 본래 그런 것처럼 된


<종이에 쓴다>는 행위는

다른 나머지 <손으로 쓴다>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종이에 쓴다는 것

손으로 쓴다는 것이 만나면 어떻게 되지?



그 차이를 무어라고 기술하는가는 차라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범주의 일인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절절한 사랑의 이메일


절절한 사랑의 동영상


그리고

담담한 사랑의 손편지.



발견된 문자메시지


그리고

발견된 종이일기장.



태블릿에 그리는 너와

도화지나 공책에 그리는 너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 일을 할 때에 빠져드는 것,

거기서 우러나는 것이 다른 탓에.


손으로 쓴다는 건

내가 만든 공간(사이버 공간, 디지털 장치)이 아니라

내가 만들지 않아도

엄연하게 존재하는

나에 앞서 피조(被造)되었든

스스로 창발(創發)하여 진화(進化)했든

아무튼

나보다 앞선 것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나의 연장이 아니라

내가 그네들의 연장이고, 그네들 중 하나인

내 어떤 판단에 앞서 이미 가치를 지닌,

그 ‘너’들과

관계 맺고,

그 ‘너’들을

변형하는 일이다.


그것은 ‘관계’를 일으키고

그 관계는 망각에서 자유롭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된다.

거기 남고, 거기서 영원히 이전과 이후를 가른다.

(실은 디지털 작업도 그런 속성이 있지만

같지 않고, 아무리 닮았대도

우리가 그것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건 유용성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갖는

‘초과’의 특성을 갖는다.


‘관계’ 사건이고, ‘초과’ 사건이다.

손으로 쓰고

종이에 쓴다는 것이 그렇다.


이는

매력의 영역에 있다.

반함의 영역, 빠져드는 사건이다.

다 알고도 속아주는, 그것이 기쁘고 즐거운 

그런 성격의 사건이다.

내가 만나서

너를 만나서

나와 너가 한데 바뀌는 사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이야기-함/이야기함과 동시에 이야기-됨이 주는

환희만큼이나 선명하게


종이에

손으로

쓴다는 것은

미칠 듯한 흥분, 그러나 아침처럼

폭발적이고 고요한

신비로운 매력을 준다.


그리고 그러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물질성을 분명히 하고

마찰과 ‘새김’의 경험을

뚜렷한 감각으로 제공하는

만년필은 매력적이다.

닳아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웅변하는 연필은

당당하고 애처롭고 발랄하고 처연하다.


사각거리면서

종이에 패인 자국을 내고, 동시에 안료를 물들이는

저 만년필은

거친 운동과도 같은 분명한 감각의 환기와  

정신의 명징한 일깨움을

동시에 일으킨다.

그리고 그 씀의 세월이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감이

보는 것만으로 공기를 바꿔 주고

고유한 아우라를,

어엿한

낱낱의 한 존재로서


신 앞에 세운다.


종이에 쓴 글들은

모두

제사(祭祀)이고

축제(祝祭)이고

엄숙한 잔치, 회합(會合)이다.


종이에

손으로 쓰는 것들은

하늘에 올리는 글, 알리는 글, 고천문(告天文)이다.

하늘과 땅을 깨워 잇는 북소리, 고둥이다.


잠기고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사람에게 스미는

북소리이다.


쓰는 것은

세계를 바꾸는 일이며

하여


펜은

칼보다

강하다.



그 효과가 영구하며

부분에 가할 때에도

전체에 대한 행위이다.

마치

한갓 찰나의 마음의 떨림마저

‘신 앞에’ 놓이고 바쳐지듯이.


그러니 전율할 수밖에.


종이에 쓴다.

내 손은 지금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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