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
"이사님,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벌써, 짐 정리를 다 했어? 빠르네. 내일 봅시다."
두 번째 직장을 다닌 지 3개월이 지났을 때다. 회사에서 부서 간의 자리 이동이 있었다. 우리 부서는 월요일 아침에 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일요일에 잠깐 나와 책상 정리를 하기로 했다. PC에 전원을 연결하고, 랜선과 전화선을 꽂고 인터넷과 전화가 잘 되는지 확인했다. 화장지를 물에 적셔 책상을 한번 쓰윽 닦고 나니 10분이 채 안 걸렸다. 남들은 개인 짐이 박스로 한 개 또는 두 개나 되었으나, 나는 각티슈, 수첩, 볼펜, 달력 정도로 단출했다. 딱히 할 것이 없고, 계속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먼저 집에 가겠다며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2002년 가을, 나는 한동안 직장에서는 미니멀리스트였다. 첫 출근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 회사를 얼마나 다닐 수 있을까 막막했다. 회사 전체 직원 수는 칠십여 명. 우리 팀은 남자 선임, 여자 선배, 나까지 세명이었다. 다른 팀도 비슷한 숫자였다. 딱히 일이 힘들거나 사람들과 관계가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연잎의 물방울이었다. 연잎의 표면은 매끄럽다. 하지만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해서 연잎 위의 물방울은 잎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 시절 나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겉돌았다. 3개월도 못 버티고 퇴사할 것 같아 일부러 개인 짐을 만들지 않았고, 주말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학원을 다녔다.
한 회사에서 같은 일을 20년 동안 하고 있다. 사업 초창기에 이 일을 시작했고, 번성기를 거쳐 쇠퇴기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그동안 이직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고, 일이 재미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때로는 일이 지겹고 사람도 싫어져서 이직을 시도했고, 실패하기도 했다. 회사 다니는 거 자체를 견디기 힘들어서 회사를 잠시 쉰 적도 있고, 회사가 어려워져 구조 조정을 했는데 운 좋게 살아남기도 했다. 팀 사람들도 세명에서 시작해서 열다섯 명까지 늘어났었다.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 파트마다 파트원이 세네 명 되었다. 지금 우리 팀 인원은 총 다섯 명이다.
책상의 짐도 많아졌다가 다시 줄었다. 한때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책상 벽면에 놀러 갔을 때 찍은 풍경 사진을 붙여놨다. 장시간 모니터를 보다가 이따금 사진을 보면 눈의 피로가 풀리고, 여행 때 좋은 추억이 떠올라서 힐링이 되었다. 좋은 글도 붙여두고 지칠 때마다 읽어보기도 하면서 에너지를 받았다. 한 회사에서 참 많은 자리이동이 있었다. 같은 층에서 구역을 옮기기도 했고, 층이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짐을 줄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 책상에는 최소한의 물품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금요일마다 퇴근 전에 책상 서랍을 확인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린다.
가끔 어릴 적에 봤던 터미네이터 2가 생각난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용광로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곳을 떠나는 날 나도 영화처럼 기억에 남는 엔딩을 하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터미네이터 주제곡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볼까.
* 상단 이미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