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숨통
자신의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고, 아예 연락을 끊는 사람이 있다. 신호는 다양한 방식으로 보낼 수 있다. 직접적으로 힘들다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은유적으로) 사진, 그림, 글 등을 자신의 SNS나 프로필 사진에 올릴 수도 있다.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이다. 문제는 연락을 단절하는 경우다.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소통하는지 몰라서 자기만의 세계나 공간에 갇혀 빠져나올 생각을 못한다. 한편으로는 힘이 들면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수도 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엄청난 정신적 방황에 빠져 말 그대로 두문불출한 제자가 있었다. 오랜 시간 연락하며 지낸 제자였는데 입대하기 전에 나와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는 정작 약속 날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냥 잠만 잤다고 한다. 군 입대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잠으로 도피한 것이다. 바쁜 일 제쳐 놓고 약속을 잡았는데 잠을 자느라 못 나왔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오죽 힘들면 저런 행동을 할까 생각하며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방에 갇혀 사회에 고립되어 계속 벽을 세우고 있다. 이런 친구들은 어려움에 처하면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다. 이런 사람들은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을 하든 하지 않든 개의하지 말고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 등을 보내 계속 연락을 하는 것이 좋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보자. 그것이 그 사람과 소통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손을 내민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소통의 손을 내밀어 그 친구들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나도 힘든데 누군가가 나에게 고민이나 어려움을 토로하면 나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 고민을 자신에게 털어놓는다면 그 정도로 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내가 더 다가가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반대로 내가 그런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의 내 경험에 따르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연락을 취해도 바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내 마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다시 연락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락이 두절된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만나면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잔잔하게 이야기하며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묘한 카타르시를 느끼곤 한다. 연락이 안 되었다가 만났다는 기쁨도 있고, 한동안 소식을 끊고 혼자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짠한 마음도 든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민, 아픔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자 지우는 미국 명문대에 진학해서 지금은 너무나 잘나가는 친구다. 하지만 대학 입시 때 지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우보다 스펙이 한참 떨어지는 친구가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합격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지우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또 한 번 세상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안 되는구나 싶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대학에 들어갔다. 지우는 내가 아끼는 제자여서 군대에 있을 때 내가 면회까지 갈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우가 나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공부에 열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정을 들어 보니 군대를 제대한 뒤 진로와 관련하여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했다고 한다. 유학 생활과 자신의 스펙을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국내 로스쿨에 입학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누구나 알 만한 대형 로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공부에만 매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지우의 그런 결정을 존중하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아쉬움이 많은 결정이다.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주위 친구들과 연락을 끊으면서까지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위해 앞만 보고 돌질해야 할까.
저마다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나는 사람보다 더 소중한 자산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꿈,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기존의 인간관계를 다 청산한다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을 때 과연 주위에 친구들이 남아 있을까. 진짜 친구라면 그 정도도 못 기다려 주냐며 섭섭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번번이 뜻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삶이 쪼들려서 ‘사면초가’ ‘진퇴양난’이라는 한자성어의 뜻을 절감하는 때가 있다. 누구라도 인생에서 마주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을 겪게 된다. 그럴 때는 정말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고, 온통 내 문제에 빠져 있어 친구의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정도가 심하면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서 연락을 끊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지우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소통의 숨통은 끊지 말고 열어 놓으라고 권한다. 숨통이 끊기면 나중에 다시 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 친구들, 사람들을 만나는 게 힘들고 괴롭다면 그중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연락을 해서 소통의 숨통을 열어 놔야 한다. 가끔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먼저 전화를 하는 것이 힘들다면 문자메시지로 근황이라도 전하는 것이 좋다. 소통의 시작은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고, 남의 이야기를 진실되게 들어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고립무원의 상황이라 어느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는 처지라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을 하자.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때 느끼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불쑥 솟아오르는 감정을 여과 없이 글로 써 보자. 욕설, 내용, 글씨체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생각나는 감정을 모두 토해 내고 나면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다. 그러고 나서 그런 나를 인정하고 위로해 주자. “지금 정말 힘들구나. 굉장히 답답하구나. 마음고생이 많구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닥쳐도 소통의 끈을 놓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현재의 고민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고 그 고민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민의 혹을 떼려고 만났다가 더러 혹을 붙이고 올 때도 있지만 일단 지인들을 만나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