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가 끝난 주말이면, 다시 먼 시골길을 달려 한 어머님을 만나러 간다.
이제 돌아보면, 내가 만난 건 아픈 무릎이나 굽은 허리만이 아니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냄새, 땀의 무게, 그리고 어머님들의 삶이었다.
봄에 만난 어머님은 길가에 핀 꽃처럼 수줍게 웃으셨다.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가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을 것이다.
함께 밭을 매고 흙을 뒤집고, 잡초를 뽑다 보면 어느새 날이 저문다.
"이 날씨엔, 감자 심는 게 제일이야."
꽃 몽우리처럼 툭 터져 나온 어머님의 첫 마디.
그렇게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름이 찾아온 마을은 후끈한 기온이 우리를 먼저 반겼다.
햇살은 강했고, 풀벌레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여름은 어머님들의 등이 가장 많이 굽는 계절이다.
끝없는 밭일에 손을 멈추지 않으며 자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젠 다 커서 다들 잘 살고 있지. 가끔 전화도 오고."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하셨지만,
그날따라 거실에 있는 휴대전화를 자꾸만 힐끔거리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여름은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들이
무심한 말 속에 녹아드는 계절이었다.
어느 때보다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은 계절.
이젠 치료보다 어머님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깻잎을 따고, 고구마를 굽고, 된장을 뒤적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끝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고, 손끝마다 정이 묻어났다.
며칠 전에 딴 감이 벌써 익어 간다고 하셨고,
마당 끝, 오전에 쌓아놓은 땔감 더미를 보며
"월동 준비는 걱정 없지"하고 웃으셨다.
무엇 하나 급할 것 없이, 자연도, 사람도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마당에 바람이 불고, 창문엔 김이 서렸다.
모두가 움츠리는 계절, 어머님들도 집 밖에 나오기 두려워하셨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화목난로 속 타오르는 장작들.
따뜻한 방 안에서 지난가을에 수확한 작물을 구워 먹는 재미가 있었다.
눈길에 미끄러지진 않을까 서로 걱정인 우리.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어 산길을 내려갔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을 때,
창문에 어머님이 조용히 손을 흔들고 계셨다.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였다.
내 마음도 계절을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서두르지 않아도 꽃은 피고,
여름의 땀은 가을의 웃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