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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ch Aug 14. 2020

혼의 직조: 시오타 치하루

아트인컬처 2019년 9월호 'Artist'

드레스 여행가방 열쇠 창문 배 같은 일상 소재를 붉고 검은 색실의 거대 서사로 직조해 내는 퍼포먼스, 설치미술 작가 시오타 치하루. 그의 작업은 사적이고 내밀한 체험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경계’의 안팎을 드러내며 기억, 정체성과 존재의 의의, 삶과 죽음 같은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 오사카 태생의 베를린 이주자로, 난소암 생존자로, 무엇보다 예술가로, 시오타가 걸어온 25여 년의 작업 여정을 총 결산하는 대규모 개인전이 순항 중이다. <시오타 치하루: 전율하는 영혼(Shiota Chiharu: The Soul Trembles)>(2019. 6. 20~10. 27 도쿄 모리미술관 / 2020년 현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 중 8.23까지). 역대 최대 규모로 꾸려진 이번 전시에는 초대형 설치작업과 함께 조각 드로잉 사진 퍼포먼스 기록영상 및 무대장치 자료 등 116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 제목은 감각을 흔드는 불안함에 맞선 작가 자신을 가리킨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작품을 매개로 다른 영혼과 공명하길 바라는 작가가 관객에게 건네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도쿄 현장에 다녀온 Art가 지면 전시를 꾸몄다. 시오타 치하루의 손끝에서 맺어진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세계로 항해! / 한지희 객원기자



우리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부재 속의 존재’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의식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과 감정을 침대 드레스 의자 신발 열쇠 등과 같은 일상적 매개체를 빌려 시각화한다. 2005년 난소암을 진단받고 수술 끝에 병마를 이겨냈으나 2017년 암이 재발하자, 작가는 삶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더욱 끌어안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히려 창작 의지를 불태우며 그 불안과 고됨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몸이 수명을 다해도 ‘나’를 구성하는 입자, 혹은 의식(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뜨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작품 바깥에 머물렀던 작가의 ‘현전(Presence)’은 작품 안에서 직접 언급되기 시작한다.

    전시 커미션작 <Out of My Body>(2019)도 그중 하나. 작가의 신체 일부를 본뜬 조각과 붉은 가죽 걸개로 구성한 작품이다. 항암치료 중 컨베이어 벨트에 몸을 뉘인 작가가 몸과 영혼이 분리된 듯한 느낌을 받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영혼의 ‘부재’를 형상화한 것이다. 같은 공간에 전시된 <Connecting Small Memories>(2019)는 벼룩시장에서 사 모은 인형놀이 소품을 펼쳐 놓고 붉은 색실로 군데군데를 이었다. 인형놀이가 재현하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지를 환기하는 동시에, 미래가 불분명한 작가가 느끼는 상실감을 역설한다. 이처럼 소품, ‘추억거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앞선 연작 <Where to Go, What to Exist>(2010)에서도 나타난다. 여행 가방에 출처가 불분명한 사진, 신문스크랩, 건축물 부스러기 등을 담아 놓은 이 작품은 추억을 이고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진리로 수렴하는 에너지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2008년 시오타의 작업을 “요동치는 바깥의 힘이 고요한 중심을 향해 가는 태풍 같다”라고 묘사했다. 이듬해 작가는 연극 <Tattoo>(토시아키 오카다 연출 2009)의 무대장치를 만들 때 극에서 “나선형 계단의 가장자리를 오르내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중심에는 불변의 진리가 놓여 있고, 이에 가까이 가고자 계속 움직이지만 약간 벗어난” 형국이라 덧붙였다. 전시기획자 카타오카 마미는 이러한 구조를 시오타의 작업에 적용해 보면, 이 진리란 “작가의 무의식 중에 깔린 공허한 감각 혹은 상실과 부재 속에서 존재를 찾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진리를 모색하는 과정이 태풍과 닮은 모습으로 작품에 표현된다는 것. 중심으로 수렴하는 (곡)선 이미지는 특히 시오타의 드로잉에서 두드러진다. 2018년작 <Storm>과 <Cell>처럼 나선/원형을 직접적으로 채택하거나 <Red Coat>처럼 대상을 중심으로 배회하는 짧은 선을 그려 넣는 방식이 나타난다. 역동적 에너지가 발산하기보다 묵직한 구심을 향하며 평정을 이루는 조형 어법이다.



무대에 올라, 배우와 함께


2003년부터 시오타 치하루는 오페라와 연극 9편의 무대를 제작했다.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그에게 연출가 퍼포머 안무가 등과 협업하는 무대 작업은 도전이자 기회. ‘부재 속의 존재’라는 주제를 추구해 온 그는, 퍼포머가 실재하고 이들이 무대장치/작품과 호응하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다. 4편의 오페라를 함께한 연출가 다니엘 카라섹은 말한다. “시오타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공중에, 의식을 치르듯 펼쳐진다. 존재와 과거와 미래, 현재와 형이상학적 질문을 엮어 낸다.”



삶과 죽음의 연속선에서


시오타는 어린 시절 할머니 산소에서 고인의 숨결을 듣고, 처음으로 죽음에 수반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시작, 더 큰 우주로 나아가는 상태”로 이해한다. 인간이 죽으면 되돌아가는 곳이자 생명이 시작되는 흙과 땅은 이후 주요 모티프로 자리 잡는다. 이때 태생지는 개인의 역사에서 씻어낼 수 없는 요소임을 깨닫고, 흙을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확장한다. 지하세계를 상상한 <In the Earth> 연작(2012)은, 작가에게 땅이 생명의 근원을 현현하는 모티프임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것은 땅속줄기처럼 모든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작가노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을린 피아노, 관객석, 검은 실로 메운 <In Silence>(2002/2019)는 침묵과 소리라는 추상적 개념을 다룬다. 불에 타 연주할 수 없는 피아노는 생을 다했지만, 그 침묵이 역설적으로 소리를 추억하게 하며 더 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시오타는 피아노와 관객석을 검은 실로 뒤덮어 그 소리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안팎의 경계, 확장하는 피부


“인간의 피부는 첫 번째 피부다. 옷은 우리의 두 번째 피부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 번째 피부는 벽, 문, 창처럼 우리 몸을 둘러싼 공간을 이루는 것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오타는 질문한다. 1996년 독일로 이주해 완전히 다른 환경에 노출되면서 작가는 자연스레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주매체인 회화를 버리고 새로운 매체를 탐구하던 그는 신체를 직접 이용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고향, 나아가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처럼 여긴 흙에서 나체로 구르거나(<Try and Go Home> 1997), 몸에 흙을 바르고 씻어내는 퍼포먼스(<Bathroom> 1999)가 초기 대표작. 얼마 후옷이라는 ‘두 번째 피부’를 발견한 작가는, 감싸진 몸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이자, 그 안과 밖,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옷 모티프를 제시하기 시작한다.

    <Reflection of Space and Time>(2018)은 드레스 두 벌 사이에 양면 거울을 배치해 가상과 현실이라는 층위를 덧붙여, 이미 옷이 내포한 이중성에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부여한다. 2004년 무렵 베를린 재개발 당시 동베를린 지역 재건축 현장에서 버려진 창문을 보고 시오타는 ‘세 번째 피부’의 가능성을 설득한다. 집 안팎을 가르는 창문과 벽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모두 마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베를린’의 창문에는 28년간 같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동족끼리 서로를 경계 지었던 기억이 선명히 각인돼 있다는 점에서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가에게 매력적인 재료였다. 작가는 “내 피부를 재구성하고 늘이듯 작업을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지” 실험하며 차츰 창문을 시각 어법으로 흡수해 나갔다.



*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 / 1972년 일본 오사카현 출생. 교토세이카대학 회화과 졸업, 함부르크미술대학, 베를린미술대학, 브라운슈바이크 조형예술대학 등에서 수학. 도쿄 모리미술관, 베를린 그로피우스바우(2019), 남호주미술관, 영국 요크셔조각공원(2018), 상하이 파워스테이션오브아트(2017) 등 세계 유수의 전시기관에서 개인전 개최. 상하이 유즈미술관, 세토우치아트트리엔날레(2019), 시드니비엔날레(2016) 에치고츠마리아트트리엔날레(2009) 등 다수의 국제 미술행사 및 단체전 참여.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대표작가로 선정(2015). 일본 문부과학성 예술창작지원상 수상(2008). 폴란드 카토비체 실레시안미술관(9. 26~2020. 5. 17), 브뤼셀 벨기에왕립미술관(10. 11~2020. 2. 9)에서 개인전 개최 예정. 베를린에서 활동 중


원고 작성: 한지희

교정 교열: 김복기

디자인: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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