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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호 Nov 11. 2019

네팔의 버스안내원 칸챠





네팔의 모든 버스에는 안내원이 있습니다. 손님들 사이를 거침없이 휘저으며 요금을 걷고, 구깃한 지폐를 착착 펼치고 정돈하는 모습은 은행원의 솜씨에도 뒤지지 않죠. 버스에 적힌 행선지를 못 본 이가 있을까 거리의 사람들에게 목적지를 외치며 호객하기도 합니다. 문에 매달려 툭툭-하고 버스를 두들기는 그의 손짓에 버스는 출발하고 정차합니다. 달리는 버스에서 내리고 타는 일에도 능숙합니다. 아, 이건 손님들도 마찬가지고요.


히말라야를 향하는 아침, 게스트하우스에 불필요한 짐을 맡기고 조금 가벼워진 배낭을 둘러매고 그만큼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로 나섰습니다. 안갯속에 잠들어 아직 깨지 못한 식당과 상점들. 부지런한 비질로 안개를 걷어 내는 아주머니의 부지런한 움직임. 쓸려 온 바람 속에 느껴지는 낯선 땅의 산뜻한 냄새. 어쩐지 기분 좋은 아침. 그냥 좋은 날이 있잖아요. 무엇이든 좋을 날이겠죠. 어제 빌린 값싼 등산화의 이질감마저 가뜬하게 여겨집니다.









반듯하게 빛살 쳐진 길 위로 버스가 아침을 깨우며 다가옵니다. 두 팔을 팔랑거려 버스를 세우고 운전석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나야풀까지 가야해! 나야풀!” 외치는 내게, 엄지를 세워 등 뒤로 까딱하고 운전기사는 탑승을 허락합니다. 문이 열리자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칸챠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 번의 시도로 히치하이크에 성공한 듯 신이 나 버스에 올랐습니다. "늦잠을 자 버려 두 시간이나 늦었지 뭐야." "택시는 너무 비싸. 글쎄, 1000루피나 하더라니까. 근데 이 버스 요금은 얼마지?" 손님이 없어 한적한 칸챠 옆에서 유일한 손님이 되어 우쭐해진 여행자는 재잘거립니다. 능숙한 영어로 뜨내기 여행자를 안심시키는 칸챠. 버스는 얼마 가지 않아 페와 호수에 멈춰 섰습니다. 기점인 이곳에서 휴식 후 다시 출발한다고 하네요. "그래? 물론, 좋지!" 버스에서 내려 호수 앞에 칸챠와 나란히 섰습니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5년간 일하고 작년에 돌아왔어. 더 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그의 손에 새겨진 깊은 주름이 그 시간을 증명했습니다. "많은 네팔 사람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 나도 방법을 찾는 중이야." 가족을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는 그의 눈빛은 무덤덤했지만 안개 보다 짙었습니다. 어쩐지 좋은 녀석. 그냥 좋은 사람이 있잖아요. 칸챠가 그랬습니다. 서투른 표현으로 응원의 말을 건네려다 그만두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를 향해 조금 기울어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 잠시나마 우리를 같은 길 위에 있게 합니다. 자주 멈추고 그럴 때마다 칸챠가 자리를 비우는 조금은 부산한 시간 속에서, 여러 번 기울고 쉼 없이 덜컹거리며 그에게 주어진 삶과 나에게 남겨진 여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의 삶을 어찌 나의 것과 비교할 수 있겠냐만, 동갑내기 칸챠의 꿈은 나의 꿈과 닮아있기도 했습니다. 


임무를 다한 버스는 바그룽 버스 파크에 멈춰 섰습니다. 여기까지인 동행이 못내 아쉬워 천천히 발을 내려놓았습니다. 남은 내 여정을 위해 다음 탈 버스와 내려야 할 곳을 몇 번이고 일러주는 칸챠. 문득, 툭툭하고 두드리던 버스 창문에 종이를 대고 무언가를 휘갈깁니다. 칸챠의 주소를 받아들고 그의 손짓처럼 착착하고 정돈해 움켜쥐었습니다. 다가온 아주머니의 짐을 버스에 올려 싣고 다음 행선지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홀로된 길 위를 걷습니다.


나의 고향에서 일했다는 청년의 도움에 의지해 낯선 도시의 위태로운 밤을 헤쳐나가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가족의 집을 마련했다는 아저씨의 집에서 그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따스한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 수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일할 방법을 물어오곤 합니다. 나는 여전히 버스를 세워 몸을 들이밀고 목적지를 외치며 내민 손에 의지해 버스에 오릅니다.









길 위에서 이어진 수많은 만남과 이야기들, 그 순간 잠시 맞잡은 두 손에 어쩐지 힘을 주어 쥐어보게 되는 건 문득 칸챠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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