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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호 Nov 17. 2019

그립다 말을 하면 견딜 수 있었다





마당을 뒤덮은 은행나무 잎이 행여 다칠까 조심스레 무게를 덜어 떠났던 발걸음은 짧은 여정에도 천근의 무게를 얹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니 겨울. 떨어진 낙엽들은 미련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어느새 수북이 쌓인 눈은 미련마저 녹여 차가운 땅 밑으로 스몄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두 손으로 움켜쥔 눈덩이에선 어쩐지 푸석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신발 따위 젖어도 상관없으니 더욱 터벅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텅 빈 방문을 열고 무거운 짐을 탈탈 털어내고, 그렇게 여행은 끝났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며칠을 앓았습니다. 계속된 고된 여정 때문이었는지, 좀체 생겨나지 않는 식욕에도 꾸역꾸역 삼켜냈던 거친 식사 때문이었는지,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몸 안으로 스며든 것이었는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파야 할 이유가 충분했으므로 차가운 바닥에 앉아 미지근한 소주를 기울이고 뜨거운 담배를 꺼냈습니다. 나는 당신을 앓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아픔은 분명 달가운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너무도 단단해서 번번이 목에 막혔습니다. 수차례 꺼내보려 했으나 다시 삼키고는 눈시울만 붉혔습니다. 빛나는 당신의 탓이었습니다. 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누군가의 투명한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속으로만 삼키던 말들을 이제 입 밖으로 꺼내야 할 것입니다. 주저하던 마음을 쓰다듬고 환하게 웃는 당신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느리지만 또박또박 당신을 말하려 합니다.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난다면, 눈물로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당신을 꺼내두고 그립다 말을 하면, 나는 다시 그곳에서 숨을 쉬었습니다.









여행이란 하나의 삶을 선물 받는 것이라 여겼지만, 거듭된 여행에도 아직 그곳에서의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겠습니다. 엇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우리의 다음을 향해 웃음 지어봅니다. 당신의 얼굴이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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