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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도 요가도 꿈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찾아오는 것들을 대하는 마음

기장님은 조종사가 꿈 이셨어요?


시뮬레이터 훈련 퇴근길, 인천에 사시는 기장님과 한 차로 이동하며 나는 어렵게 말을 건냈다. 어색한 기류를 깨기 위한 노오력이었다. 사전 미팅까지 포함하면 무려 3번이나 만났고, 하루 평균 6시간을 함께한 사이지만 차 안에서는 (나만 그런것 같은) 어색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조종사가 꿈이냐는 말. 당시 내가 자주 받는 질문이기도 했다. 누구를 만나든 조종사라는 직업은 생소함과 신기함을 불러 일으키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직업이었으니까. 비슷한 질문들이 있다.


그러면 공군사관학교를 나오신 거에요?

원래 그 뭐냐…전공이 비행기 조종이셨서요?

어릴 때 꿈을 찾아 진로를 바꾸신 거에요?


주변 사람들 중에 생각보다 ‘저 사실 조종사가 꿈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다. 아마도 어릴 때 생활기록부를 뒤적뒤적 하다 보면 본인 장래희망에 조종사 라고 적혀 있는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도 조종사가 꿈인 친구가 있었나?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없던 것 같다. 내 생활기록부에는 아마 과학자? 건축가?가 쓰여저 있을 것이다. 그 조차 꿈이기 보다 전자기기를 좋아했으니까 억지로 적은 직업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공대와 거리가 조금 있는 일을 하고 있다.


획기적인 또라이.. 아니 획기적인 진로 변경은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듯 했다. 한 대학교 선배는,


우리 회사에 너 이야기 하니까 고민하는 사람 있다?! 엄청 신기하다고. 내 후배중에 같은 전공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종사로 진로 바꾸더니 지금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니까 그게 가능했던 걸 이제야 알았다고 ’자기도 해볼까‘ 하면서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어.


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다시 퇴근길 이야기로 돌아가서

기장님도 나도 조종사가 꿈이었냐고?

넓은 범주에서 기장님과 나의 대답은 같았다.


먹고 살려고.

어디선가 구독자 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길 바래요.


어릴 때 꿈이 블랙이글스(대한민국 공군 에어쇼 파일럿)가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요? 아 멋있다. |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하고픈이들에게 영광이! 님)


기장님의 대답을 추억하다 보니 영화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 배우가 연기했던 전두광의 대사가 생각났다. 쿠데타를 망설이는 후배 장교들에게 '니들 서울대 갈 성적 되는데 집에 돈 없으니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사관학교 간거 아니야.' 라고. 기장님의 세대에서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마음껏 공부하고 싶어도 성적이 훌륭한데도 집안 형편 때문에 사관학교에 가게되는 경우. 학비가 0원이니까.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품위 유지비라며 용돈도 주니까. 우연히 사관학교를 입학하고 우연히 비행이라는 특기(직무)를 배정받아 훈련을 받아 조종사가 되는 케이스가 기장님 세대에는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온 장교들을 설득하는 장면 | 출처: 영화 <서울의 봄>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것은 '필드에서 일하는 전문직'이었다. 학교에서 연구하는 것도 좋았고 그 길을 쭉 따라가도 좋겠지만 20대 후반에 할 수 있는 사회생활과 경험도 놓히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길을 가는 전문가이면서도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비행하는 조종사는 선택지에 없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이 길의 존재를 알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대학원 지도교수님께서는 학부 수업에서  '드론 날리다가 직접 날고 싶어서 조종사가 된 제자가 있다.'고 하신다.

(교수님 사랑합니다. 혹시 글을 보실까봐요.) 

 

비행을 시작하고 만난 인연들 중에도 어릴 때 꿈을 쫓아 온 멋진 분들도 있지만, 우연히 비행을 시작하게 된 분들이 꽤 많았다. 과정과 계기는 다르지만, 이렇게 우연히 삶에 비행이 찾아오는 분들이 있다. 예전에도 지금도.


보정이 과하지만, 조종사를 도전하기로 마음억은 여행길의 사진으로 기억된다. |  저작권: 요파




죄송해요 저희는 남자 회원을 받고 있지 않아요.

필라테스 센터에서 여러 번 거절 받았다. 남성 회원은 수업 참여가 어렵다고. 이유는 몰랐다. 딱히 물어보지도 않았다. 짐작되는 이유가 있었지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당시 유연성과 코어운동을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필라테스를 떠올렸다. 인터넷에 등록되어 있는 집 주변 거의 모든 필라테스 센터에 연락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안된다고. 다음으로 문득 요가가 생각났다. ’요가가 필라테스처럼 유연성 운동이지 않아?’ 라며.


”ㅇㅇ역 필라테스“ 라고 적혀있는 검색창에서 “필라테스”를 지우고 “요가”를 넣어본다. ”ㅇㅇ역 요가“ 그리고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본다. ‘남자도 할 수 있나요?’ 다행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내 삶에 요가가 들어왔다. 우연히.


내 인생에 요가와 만두카 매트는 원래 없었다 | 저작권: 요파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지면서 회사를 쉬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훌륭한 휴가가 없었지만, 회사가 쉬라고 했다고 집에 가만히 있으니까 이런 저런 걱정들이 올라왔다. 다른 항공사의 부기장 해고 소식은 불안을 더했다. 그러던 중 요가원의 한 광고가 눈길을 끈다.  


빈야사 요가 지도자 과정 모집


요가는 좋아하지만,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 고민하는 것 보다 공부하고 운동을 조금 깊게하면서 건강이라도 챙기자는 마음으로 지도자 과정을 시작했다. 덕분에 요가가 더 재미있어졌고 더 재미있게 이어가고 있다.


필라테스를 시작하게 되었다면 요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가를 시작하더라도 코로나로 인해 한달 이상의 휴가를 가질 수 없었다면 비행공부를 하느라 지도자 과정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가하는 친구들을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나 역시 ‘요가? 그거 하면 좋아?’ ‘신기하다. 남자도 요가 할 수 있구나’ 라고 하는 요가하는 사람의 친구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요가하는 파일럿이라는 브런치 작가명도 없었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 요가도 비행도 우연이었다.

요가하는 파일럿이라는 작가명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그것은 진짜 나에 무언가 얻입혀진 것이다. 내 이름은 나에게 부연된 것이지 진짜 ’나‘가 아니다. 나의 직업은 나에게 일정 기간 동안 부여된 역할이지 ‘나’가 아니다.

책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중


나처럼 대문자 J인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말이지만, 인생은 100%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완벽한 계획은 있지만 늘 계획이 완벽하게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배운 대로 '오히려 좋아'를 외치려고 해보지만, '오....ㅎ...오히려... 조아...어... 그래'라는 말이 나온다. 의도한 대로 가진 직업처럼 보이지만 직업도 취미도 나에게는 우연히 찾아온 존재다. 어떤 이유로 그만두지 않는다면 비행도 요가도 내 삶에 부분으로 혹은 역할로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차를 타고 싶었을 뿐이지, 벤츠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 저작권: 요파


확실한 것은


다만 확실한 것우연히 찾아온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역할에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혹은 어떤 일로 인해 그만두기 전까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조종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현장형 전문직을 원한 것처럼. 요가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유연성과 코어운동을 원한 것처럼.


나의 외모, 인상, 경제력, 스타일, 직업, 취미, 습관, 루틴 모든 것에서 나의 정체성이 뭍어 나올 것이다. 예쁜 말로 사람의 분위기라고 부르는 것들과 통하는 이야기일 것 같다.


습관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습관이 쉽다

책 <아주 작은 습관의 힘> 간접인용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지, 아이스크림 포토그래퍼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 저작원: 요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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