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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Oct 26. 2024

'휴양지의 여유'에 대한 환상

이 한 장을 건지기 위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던 것인지

뭔가를 하기 전 검색을 많이 하는 편이다. 얼마나 많이 하느냐면, 가끔은 검색을 하다가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인 듯 지루해하거나 또 가끔은 현재진행형으로 과몰입하여 헉헉거리며 숨 가빠할 정도다. 아무래도 그 실체보단 감각이나 감정으로 세상을 읽으려 해서 그런 가 싶기도 한데, 어쨌든 나는 자린고비가 생선을 매달아 놓은 채 눈으로만 먹었다는 이야기가 꽤나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긴 하다. 맛집 검색을 하다가 과식한 느낌을 받거나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에 질리기부터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음식 관련 검색은 조금 자제하기도 하니 말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가서 어디서 자야 할지, 뭘 입을지, 뭘 할지에 대해 꽤 많은 검색을 했다. 나름 긴 여행이었으니 잠자리가 가장 신경 쓰여 숙소 후기를 많이 찾아보았다. 룸 상태와 조식 메뉴, 수영장 사진들을 엄청나게 보았다. 인피니트풀이 있는 숙소일수록 호캉스 사진이 무더기로 쏟아지곤 했는데, 요즘은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아마도 그럴 의도는 아닌 듯했지만) 뒤통수 사진을 많이들 찍고 있어, 보다 보니 점점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나라도 되는 듯하여 '아, 이 각도에서 칵테일 마시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구먼' 하며 예약을 고려하다가 관둬버리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숙소 후기가 하나씩 하나씩 쌓여갈수록 휴양지에 대한 나의 환상 또한 점점 구체화되어 기대감이 몸집을 부풀려 갔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하얀 해변의 선베드에 누워 시원한 음료를 마시다가 때때로 선글라스를 코 끝에(반드시 코 중간쯤, 살짝 끝에 가까운 위치어야 한다) 걸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일 것.

테이블 위엔 무심하게 펼쳐진 책 한 권과 마시던 맥주 한 병이 놓여 있으며 그 옆엔 물에 젖은 스노클 마스크가 햇빛에 반짝일 것.

가끔은 야자수를 흔드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볼 것.

인피니티 풀에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련한 어깨를 드러낸 채 맥주나 칵테일을 마실 것. 등등.

그동안은 휴양지에 대한 나의 이런 환상이 겨울왕국 올라프의 영향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금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건 어쩌면 블로거들의 여행 후기 영향인 듯도 했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 과하게 많은 후기를 보았던 거였다.


두 번의 보라카이와 한 번의 보홀. 어쨌든 휴양지 여행을 두어 번 다녀왔다. 그래서, 이제 좀 궁금해진다. 다들 진짜로 휴양지에서 그렇게나 여유로웠던 걸까. 그걸 가지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왜 여유롭지 못했던 걸까.

그 여유라는 것, 대체 그게 뭘까.

보홀 오셔니카의 두말루안 비치. 저 코코넛, 맛 없다. 먹지마세요, 라고 말해도 다들 사진 찍어야 하니까 주문하겠지? 나처럼.


보홀이든, 보라카이든, 어떤 숙소, 어떤 장소에서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사진 찍기에 바빴다. 매 순간의 모든 장면을 동작을 바꿔가며 하나하나 세세하게 끊임없이 찍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움직이는 것인지, 움직이다 보니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인지. 보고 있자니 좀 어지러울 정도로 같은 장면을 계속 찍고 있었다.

"음... 혹시 뮤직비디오 찍는 걸까?"

가만히 보고 있던 남편이 말한다. 글쎄. 그런 가. 그나저나, 요즘도 뮤직비디오 같은 게 있나.


비치볼을 반복해서 이리저리 흔들고, 적당하게 흐드러질 정도로만 물장구를 치고, 선베드 위에서 다리 각도를 바꿔가며 이리저리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고, 망고셰이크는 다 녹아내리고 있는데 빨대만 물고 있고.

저분들은 언제 놀지? 선베드엔 언제 누워 있지? 셰이크는 언제 마시지?

나도 모르게 내내 지켜보던 순간도 있었는데(지켜보기 시작한 이유는 국민체육센터 초급반 수영꿈나무의 실력으로 헤엄을 치다가 물을 잔뜩 튀겨버려 그분들의 촬영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 한참을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사진 찍기가 끝나면 사라지곤 했다. 아마도 다 논 듯했다. 이런 장면들을 정말이지 꽤 많이 봤었다.

"아니,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사진 찍으러 온 거야?"

남편은 보는 내내 의아해했는데, 의미가 없진 않았다. 바로 저렇게 탄생한 사진들을 나 같은 사람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다. '오호라! 오케이, 휴양지에서의 여유란 말이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여유 1, 여유 2, 여유 3. 번호까지 매겨가며 하나씩 하나씩 머릿속에 저장하여 일정에 넣게 될 테니, 도리어 제법 유의미한 일이었다.

확실히 나의 여유는 올라프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블로그 후기에서 배운 거였다. 그리고 그 여유라는 것들을 하나씩 실천해 보며 깨달았는데 대체로 내겐 와닿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일단,

썬베드에 누워서 책을 보다간 목디스크에 걸릴 것 같음

당연히 음료 먹기도 힘듦. 먹을 때마다 일어났다 누웠다를 반복하다가 망고셰이크를 다 쏟아버림.

인피니티풀의 끄트머리에서 맥주 마시며 폼 잡다가 가드한테 위험하다고 혼남. 얼른 치워야 해서 급하게 원샷 때리다가 술 취해버림.

코코넛 열매는 맛이 없음. 니맛도 내 맛도 아님.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니 남들이 자꾸 쳐다봄. 게다가, 로밍해  인터넷이   터져 던던댄스는 자꾸 끊김. (  내놔. skt)

가족과(특히, 초딩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선 바람에 날리는 길고 예쁜 원피스를 입을 일 자체가 애당초 없음. 캐리어에서 꺼내지도 못함.

수영을 하다가 맥주를 마시며 살짝 무심한 듯 '브이' 하고 찍은 사진은 끝내 흑역사로 남음.

미역처럼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과 눈가의 수경 자국 혹은 스노클마스크 자국 때문에 그저 좀 많이 신난 븅신 같음. 아, 이건 꽤 난이도가 있는 것으로 내추럴본초특급미녀, 얼굴에 똥을 발라도 이쁜 사람만 가능한 거구나. 스스로에 대한 커다란 위로가 필요했음.


내 기억 속에 '여유'로 남아 있는 유일한 순간은 보홀 노스젠에서 했던 밤수영이다. 야자수가 바람에 흔들렸고 맑고 까만 밤하늘에선 별이 반짝였으며 나는 물 위에 누워 한참이나 둥둥 떠다녔다. 어쩌면 물온도가 적당해서, 어쩌면 맥주를 많이 마셔서, 어쩌면 아직 여행 초반이라 체력에 여유가 있어서, 어쩌면 본전 생각에 몸이 절로 휴양지 모드에 맞춰져서일까, 생각하다가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거나 들고 갔다 해도 밤이라 잘 나오질 않으니 찍다가 관둬버려서가 아닐까, 싶었다. 아마도 그 모든 것들이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모아 나를 '휴양지 정중앙에 온전히 던져 놓은 여유' 그 자체로 만들었던 거 아닐까.

물미역이 되든 말든 물 위에 벌러덩 누워 이리저리 떠다니며 별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흘러가면 우주에 닿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때가 나의 휴양지 여행 중 유일한 여유였다.


+ 그러니까, 이건 나로선 아주 아주 많은 연출이 필요했던 휴양지 st의 사진

나처럼 안 보이게 찍어야 한다고, 5등신임을 알 수 있게 정직하게 찍으면 안 된다고, 남편한테 신신당부를 했다. 이 사진들을 찍느라... 저 순간들을 즐기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 사진 또한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어쩐담.


여행의 경험치가 올라가면 인생 사진과 인생 여유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까. 참 난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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