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 다녀왔던 보라카이 여행은 완결되지 못한 이야기 같았다.
보라카이에 도착한 다음날 저녁부터 아들에게 엄청난 썬번이 왔었다. 검붉게 부어오른 얼굴 때문에 병원을 다녀온 후 이틀을 숙소에만 있어야 했고 남편과는 심하게 다투었다. 극적인 화해를 하긴 했지만 아들의 컨디션이 내내 좋진 않았기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큰 여행이었다. 분명히, 하늘빛과 똑 닮은 바다를 바라보며 느리게 밀려드는 파도소리를 듣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신비아파트의 도깨비라도 되는 존재가 나를 소환해 "어이, 끝이지롱!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라며 현실 속으로 내던져버린 듯했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보라카이의 석양과 하얗고 파란 바다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억울해지던 날들이었다.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내년에 꼭 다시 보라카이에 가는 거야"라고 선전포고 하듯 몇 번이나 말했다. 정말이지 꿈이었나 싶었던 그곳이 내내 그리워서 스테이션 1부터 3까지 화이트 비치를 쭈욱 찍은 유튜브 채널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른다.(채널명: 보라카이 생존기)
직항이 없어 보홀을 거쳐 보라카이 여행을 떠나면서도 사실, 보홀은 깍두기 같은 곳이었다. 드디어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땄으니 거북이랑 열대어를 좀 볼까 하는 기대가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 여행의 목적지는 보라카이였다.
딱, 보홀에 도착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뜻밖에도 보홀이 좋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보라카이행 비행기들이 점점 보홀행으로 바뀌고 있어 가끔은 얄밉기까지 했던 보홀이었는데 첫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부터 단박에 그곳이 맘에 들고 말았다. 새소리에 눈을 뜨니 온통 푸른빛이었다는 말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보라카이가 새하얗고 아득한 푸름이라면, 보홀은 쨍하고 맑은 푸름이었다. 물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기만 해도 산호초와 열대어를 볼 수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바닷속 세상이 너무도 투명하고 아름다워서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엔 보홀의 바다가 압도적으로 훌륭하고 좋았다.
(남편) 여기가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그냥 여기에만 2주를 있을 걸.
(아들) 엄마 진짜로 내일 보라카이로 가야 해?
남편과 아들은 보홀을 너무 맘에 들어하며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진짜로 가야 해?라고 아들은 몇 번이나 물었다. 나 또한 그곳이 몹시도 좋았기에 비행기와 숙소가 변경 가능했다면 일정을 바꾸어서 보홀에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의 시간이 더 생겼다면 아마도 매일같이 나팔링에 가서 다이빙을 했겠지. 남편의 말처럼 오토바이를 빌려 2~3일 정도는 목적지 없이 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보홀엔 다음에 다시 오자는 말로 아쉬워하는 가족들을 달래었다. 여기까지 오는 비행기는 많으니까 언제든지(그니까, 돈만 있다면) 또 오면 되지, 대신 보라카이에 가면 한식을 사주겠다며 가족들을 구슬려 보라카이로 출발하게 된다. 안녕, 보홀.
보홀에서 다시 보라카이 섬까지 가기 위해선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탔다가 트라이시클을 탄 후 또 배를 타고 한번 더 트라이시클을 타야만 했다. 아들은 손을 쫙 펼쳤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차, 배, 비행기, 트라이시클, 또 배... 하루에 이걸 다 타야 한다고? 했다. 어, 그러게나 말이다. 확실히 보라카이는 머나먼 곳이긴 했다.
아침 일찍 차를 타고 보홀 항구로 가서 2시간가량 오션젯이라는 배를 타고 세부 항구를 향해 나아간다. 당연히 '나는 모투누이의 모아나다. 아이엠모아나, 와우!'라는 벅참이 느껴지는 항해는 아니다. 어깨를 구부린 채 좁은 의자에 구겨앉아 졸다가 깨면 세부 항구에 도착해 있다. 불한당처럼 나타나 우리의 캐리어를 낚아챈 이들에게 이끌려 정체 모를 밴에 올라탄 후 1000페소를 내어주곤 세부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살짝 정신이 나가려고 하는데 그러기엔 아직 곤란하다. 이제 시작이다.
세부 공항에 도착한 후엔 카티클란행 비행기를 기다려야 한다. 바보 같은 내가 전날 라운지 이용권을 미리 받지 못하여(카드 실적 채우느라 고생했건만 ㅠㅠ) 졸리비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스타벅스에 가고 싶었는데 비싸서 못 갔다. 그리곤 비행기를 타고 또 1시간을 날아간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이다. 칭얼거리던 아들도 지쳐서 조용해지고 남편의 얼굴도 흙빛이 되어 간다.
드디어 카티클란 공항에 도착했지만 아직이다. 보라카이는 그리 쉬운 곳이 아니다. 배를 타러 카티클란 항구까지 가야 한다. 우다다다 달려들어 또 무슨 1,000페소를 달라고 하는데 이번엔 그냥 1,000페소도 아니고 인당 1,000페소다. 너무 지쳐버려 그냥 주고 만다. 기빨리지 않는 비용으로 이 정도가 과연 합당한지 고민하다가 그냥 빨리 숙소에 가고 싶어 줘 버렸다.
보라카이 입도를 위한 배를 타게 되면 이제 거의 다 온 것이 맞다. 아침 8시에 보홀에서 출발했는데 저녁에야 보라카이 섬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20킬로그램짜리 캐리어 2개와 나머지 짐들을 이고 지고 움직이느라 너무 지쳐 있었지만, 바다를 물들이고 있는 노을을 보니 드디어 보라카이에 왔구나 싶어 기뻤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시작되어 바다와 어둠이 뒤섞여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바다가 옆에 있구나, 생각했다. 침대에 눕자 쌓인 여독이 한꺼번에 밀려들었고 언젠가처럼 '아, 이 잠은 마치 보라카이 파도처럼 느리고 잔잔하게 밀려드네...'라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오랜만에 마주한 화이트비치는 말도 못 하게 푸르고 하얗게 빛이 나서 눈이 부셨다. 아직도 꿈인 걸까. 그 앞에 섰을 때의 벅찬 마음은 여전히 내가 가진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안녕 보라카이. 돌고 돌아 내가 왔다. 다시 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