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김에 세계여행을 하는 기안84의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보단 '재미있어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기안의 그런 여행. 이를테면,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 데서나(그게 차가운 돌이나 젖은 모래바닥일지라도)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 스트리트파이터식의 여행을, 나한테도 해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나는 못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날 것 가득한 의외성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 나로선 다시 태어나도 못 할 것 같은 여행을 너무나도 즐기면서 쉽게 하는 기안84가, 그래서 꽤 재밌다.
기안과 여행하는 멤버 중 굳이 나와 비슷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덱스?! 꽃 같은 그 얼굴과 비슷하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아무거나 잘 먹지 못하고 습한 이부자리에선 잠들지 못하며, 어쩌면 낯섦에 대한 불안을 철저한 준비성으로 극복하고자 온갖 짐을 잔뜩 챙기는, 그런 부분이 나와 조금 비슷하다. 물론 단언컨대 내가 훨씬 예민할 테지만.
남편은 나와는 정반대다. 또, 굳이 비교해 보자면 남편은 기안에 가깝다. 남편은 한국에서 투어 상품을 예약하고 가는 것도 싫어했고, 맛집이나 스파의 날짜와 시간까지도 모조리 정하고 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현지에서 우리 가족의 컨디션이 어떨 지도 모르고 그날 뭘 하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다 예약하고 가느냐, 게다가 우리는 일정도 기니까 여유도 있잖아,라고 했다.
"맞지만, 가서 문의하면 이미 늦어. 다들 미리 예약하고 가기 때문에 가서 우리가 하고 싶은 날짜나 시간엔 이미 자리가 없어."라고 설명해 줘도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편은 마치 태계일주의 기안이라도 된 듯 보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호핑? 나카산(낙하산) 꺼부귀(거북이)? 나팔링? 마사쥐? 라며 다가오는 현지인과 흥정을 해가며 투어도 하고 마사지도 받고 싶어 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오토바이를 빌려 가족들을 태우고 다니며 가고 싶은 방향으로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치만, 이건 배낭여행이 아니야. 이건 가족여행이라고."라는 말로 남편을 말렸지만 사실, 가족여행이 아니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일정을 짜는 동안 J와 P의 대화가 창과 방패의 대결처럼 이어지곤 했으나, J의 전투력이 월등한 관계로 결국 이 여행은 J의 여행이 되고 만다.
보홀에선 거북이랑 열대어를 보고, 고래 상어를 본 후에 정어리떼를 보고, 육상투어를 하러 가서 집라인과 버기카를 탄다. 보라카이에선 호핑 투어를 하고 말룸파티를 가고 중간중간 호캉스를 즐긴다. 모든 투어는 후기를 꼼꼼하게 검색한 후 검증된 업체를 선정하여 미리 예약한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은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가족여행의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그럼에도 확실히 작년 보라카이 여행 때보단 여백을 많이 두었던 일정이었다.
엑셀로 만든 알록달록한 일정표를 보여주며 "봐봐, 자기야, 이 날에도 아무 일정이 없고 또 이 날에도 아무 일정이 없어. 사실 아무 일정이 없는 날도 꽤 있다고. 이런 시간엔 기분에 따라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하며 달래듯 말했더니, "기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시간까지 다 정해놓았는데 그게 왜 기분에 따라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헐... 내내 멍 때리다가 갑분 똑똑?
"어쨌든 시키는 대로 할게. 네가 준비했으니 잘 따라야지." 라며 체념한 듯 내뱉는 대답이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남편은 대체로 일정대로 움직이긴 했다. 거북이를 보러 가선 바다에 들어가는 대신 배 위에서 수다를 떨며 키득거렸고, 꽤나 고오급 스파를 데려가도 "난 좀 별로..." 라며 시큰둥해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했던 말대로 '시키는 대로' 하긴 했다. 다만, 누가 봐도 영혼 없던 순간들이 꽤 있었기에 나는 늘 남편이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지, 너무 지루해하진 않는지, 내가 느끼고 있는 감동을 남편도 느끼고 있는지에 촉수를 세워야 했다. 혼자 떠나온 여행이 아니니 가족들도 모두 나만큼 신나 하길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족들의 감동과 만족까지 모두 내 계획대로 되길 바랐던 욕심이었지만 말이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과도한 통제라고 항의했다.
"너가 공산당이냐?" 했지만, 확실하게 말하는데 그건 사랑이었다. 그래, 그 또한 사랑이라고, 남편아!
아주 극단적인 J와 살짝 치우친 P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같은 순간 같은 밀도의 감동을 느끼기란 쉬운 일은 아닌지라, 나 또한 조금씩 남편의 영혼 탑재 여부에 초연해졌는데 이것만큼은 남편도 진짜구나 느끼며 온전히 함께 했던 순간이 있기도 했다.
그곳의 거리는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꽤나 흥미로웠다. 보홀은 뭔가 보라카이보단 덜 다듬어져서 조금 더 촌스러웠는데(보라카이의 메인도로와 디몰만큼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 유명 관광지 그 자체다.) 그 엉성함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거리를 걸으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지난번 보라카이 여행에선 걸었던 일이 거의 없었다. 낮엔 너무 더워서, 아들이 걷기를 싫어해서, 중심가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꽤 되어서, 늘 트라이시클을 타야 했는데 보홀의 알로나비치와 그 근방은 아주 작고 조그마한 마을 크기정도였으며 숙소 또한 근처였기에 우린 종종 걸어 다녔다. 남편은 거북이를 보고 열대어를 보는 것보단 동네를 돌아다니며 현지의 삶을 들여다보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상점들과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80년대쯤의 풍경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릴 때 뛰어다니며 놀던 우리 동네랑 비슷한 분위긴데?"라고 남편이 말하면 내가 얼른 맞장구를 치며 "그러네. 딱 내가 놀던 골목길 같은데? 남동생이 저런 골목길 끝에 숨어있곤 했어"라고 대답했다. 마당이라고 보기에 조금 애매한 공터에서 아무렇게나 빨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릴 때 주말이면 엄마가 저렇게 빨래했는데, 그땐 세탁기나 건조기가 어디 있었어,라는 말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아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엄마랑 아빠는 그렇게나 가난했어?"라고 물어 왔고 남편과 나는 "어, 그랬지. 저기 보이는 저런 집에서 살았지."라고 대답하며 마주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 저 집에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어?
아니, 말이라고? 나 예민보스야. 지금의 나는 못 살지. 지금은 에어컨도 알고, 세탁기도 아니까 나는 이제 저렇게 못 살겠지. 아! 벌레도 이제는 너무 싫고. 어릴 때는 진짜 머리 위로 바퀴벌레가 지나다니고 막 그랬거든? 우리 집은 무지 가난해서 말이지... 어쩌고 저쩌고.
내가 살던 집은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때부터 쥐가 천장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쩌고 저쩌고.
지붕 아래 좁은 처마 밑엔 어김없이 빨래가 빽빽하게 널려 있었다. 나는 건조기 없이는 못 살 것 같은데, 비가 들이치는 처마 아래에 무심하게 널어놓은 빨래들이 정겹고 그립게 느껴진 이유는 뭐였을까. 이 분위기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내가 조금 어이없기도 했으며 이런 식의 그리움이 약간은 이기적일지도 모를 일방의 감상인가 싶기도 했지만, 바로 옆에서 거리에 가로등이 없는 것조차 재미있어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여 편안했다.
이곳의 이런 촌스러움이 너무 좋아.
온통 흙바닥인 것도, 인도랑 도로 경계가 없는 것도 너무 좋아.
엉망진창인 저 지붕도 너무 좋아.
저렇게 널어놔도 하나도 안 마를 것 같은 빨래도 너무 좋아.
내가 어릴 때 같아서 너무 좋아.
우리 엄마가 빨래하던 모습 같아서 너무 좋아.
쉴 새 없이 그런 말들을 쏟아내며 울컥울컥 떠오르던 어린 시절을 주고받던 J와 P의 느닷없는 교감이었다.
+ 남편이 재미있어했던 순간 1
거북이 호핑 때 바다는 안 들어오고 선장과 담배를 피우며 내내 수다만 떨고 있길래 아까 무슨 얘기했어?라고 물으니 키득거리며 대답한다.
이렇게 배 타고 나오면 얼마 받냐? 묻기도 하고, 서로 너는 월급이 얼마냐 그런 이야기했지.
아내는 다이버냐고 물어서 비기너라고 했어. 몇 미터까지 들어갈 수 있냐 해서 20미터쯤?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근데 내가 다시 그건 잠수풀에서,라고 했더니 엄청 비웃으며 에헤이 바다는 다르다, 그러대.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순간, 실제로 나는 부력을 뚫지 못해 5~6미터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었으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자기야, 나는 거북이 보는 것보다 그냥 현지인들이랑 엉터리 영어 주고받으며 스몰토크 하는 게 더 재밌어, 하던 남편.
++ 남편이 재미있어했던 순간 2
고래 상어를 보러 가는 길이나 육상투어를 위해 보홀 본섬으로 가는 길 곳곳에서 저 노점상을 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길게 줄을 서서 무언가를 사고 있기에 대체 저게 뭔가 궁금했는데 알로나 비치 근처에서 같은 노점상을 발견. 가만히 지켜보니 판데살(필리핀의 국민 모닝빵)을 바로 구워 팔고 있었다.
우리도 한번 사보자, 하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계속 혼자 웃기 시작했다.
왜 왜? 하는 눈짓을 보냈더니 바로 앞사람의 어깨를 가리키며 '지금 막 이발소 갔다 왔나 봐. 근데 그냥 저렇게 끝내버렸나 봐. 저게 뭐야?' 하며 키득거렸다. 잘라낸 머리카락들이 무심히 흩어져 있던 어깨와 면도크림이 덜 닦인 목덜미를 하고선 판데살 줄에 서 있던 내 아들에게 1개에 5페소임을 알려주던 그들의 무던하고 다정한 일상이 인상 깊었다.
남편은 한 달 정도만 오토바이 빌려 타고 다니며 이웃사람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내내 이야기 했다.
퇴직하면 여기 와서 잠깐 살까? 나는 거북이랑 열대어 보러 다니고, 너는 엉터리 이발소에서 머리 다 깎인 채 신나 하다가 저녁으론 갓 구운 판데살 사 와서 나눠먹고. 우리 나중엔 진짜로 그래 볼까? 생각했다.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