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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 Aug 03. 2021

필사를 잠시 접으며

삶의 파도 앞에서

1980년대, 여수에 큰 태풍이 왔다.

오동도라는 섬을 연결하고 있는 튼튼한 시멘트 방파제가

파도에 부서졌다. 별로 유명할 것 없던 소도시

여수가 뉴스에 언급된 몇 안 되는 사건이었다.

나중에 높이와 두께를 더해 보강 공사를 했다.


매일 밤 필사를 했다. 이제 잠시 접으려 한다.

즐거운 하루의 마무리였던 이 고상한 취미가

높은 마음의 겨울 파도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린 듯하다. 날(raw) 것인 삶을 취미 따위로

감당하려 했던 생각이 틀린 것인가.


그동안 필사를 통해 얻은 유익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필사는 산책과 같았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날 밤, 창의력을 발휘해

일기를 쓸 만큼 머리가 가볍지 않을 때,

여전히 마음의 엔진이 멈출 기미 없을 때,

나는 산책하듯 아무 생각 없이 필사 노트 위를 찬찬히 거닐었다.

타인이 이미 걸어가며 잘 다져놓은 그 길을 뒤 따라 밟으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고, 뜨거워졌던 생각의 온도를 낮출 수 있었다.


지난밤, 펜을 들었으나, 손끝이 떨려 그대로 펜을 놓았다.

손끝의 떨림이 글씨에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펜을 놓고, 노트를 집어 들어 얼마나 남았는지 휘리릭 넘겨보았다.

십여 장 남았으니, 이 번 권까지만 하자 속으로 다짐하고 덮었다.


내 마음은 한 번이라도 내 것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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