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화상 통역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면서
대학에 나가던 강의가 줌 강의로 바뀌었고
외국인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오지 못하고 모든
전공과목의 원격수업으로 바뀌면서 외국인 학생 지원을 위한
통번역 강의에 대한 수요가 필요 없어졌기에
2020년 1학기 강의가
학기 중에 중단되었다.
나도 아쉬웠고 학생들도 아쉬워한 수업....
그리고 팬더믹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래서 간간이 들어오는 번역에만 집중했었다.
사실 두 돌도 안된 둘째, 이제 유치원 막 들어간 첫째와
하필 2020년에 사업을 시작한 남편 덕에
가정보육도 혼자 하고 코로나 역병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에... 일이 손에 잘 잡히진 않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통역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이젠 통역은 못할 것만 같았다...
노트테이킹 기술과 메모리 스팬은 예전 같지 않고...
집에서도 매일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기억력으로는
도저히 못할 듯했다.
그런데 사람이 극한에 다다르면
영혼을 끌어내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하게 되는 것일까?
집이 날아가게 생긴 판국에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없는 상황에 맞부딪혔고
우리집 기둥인 남편은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배운 기술은 어떻게든 활용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번역 습작으로 감을 살리고
매일 외국 에이전시에 지원을 하고
통역 연습을 위해 메모리 스팬부터 늘리고
한국어를 다듬고
영어를 다시 외우고 하니
애 둘 낳고 잃어버린 내 정신력과 기억력이 돌아오게 되는 괴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문득
집이 진짜 내게 소중했구나...
서울 한복판에 자가로 있는 집의 안정감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니...
절반이 은행 소유였어도
당연하게 내 집이라 생각했었는데...
대출 이자에 허덕이며
힘겨워하는 남편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경력 단절의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사부작사부작 이력서, 포트폴리오 다듬고 영어 기사 읽고
신문 구독하고 다시 일어서면서 조금씩
감을 되찾아 가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하기를
'당신은 일을 해야지 살아나는구나?'라고
육아만 했을 때 하고는 표정이 다르다며...
나는
'아니 그러니까 능력 있는 와이프 왜 그동안 육아만 하라고 그랬어?'
라고 받아쳤지만...
사실....
4월 중순부터 프리랜서 선언해 놓고
이렇다 할 실적이 없어서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5월 초부터 컨택해온 외국 에이젼시들은
어찌나 소통이 느린지...
일을 일주일에 한 개씩만 처리하는 듯하고 답변이 느렸다.
새벽에 깰때마다 메일함 새로 고침을 눌러 확인하는 일을 한 달 반이나 했다.
어찌나 까다롭던지...
3차 관문을 3곳을 각각 거쳤으니
통역시험, 영어 레벨 테스트, 문장 구역 시험,
미국 의료 보험 교육, 미국 이민법, 법률 용어, 의료 용어 공부 등등
책을 몇 권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문학 번역 수업도 듣고 과제도 했다.
한 달 반을 긴장의 연속이었고 감각 살리기에 열중했더니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동안 다이어트를 해도 안 빠지던 살이 빠졌다(기뻐해야 하는가?)
재택근무만 하려니
선택권이 제한적이었던 나는
번역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을 수 있으니 재택으로 통역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OPI(Over the Phone Interpretation)/VRI(Video Remote Interpretation)였다.
낮이든 밤시간이든 선택해서 플랫폼 기반으로 재택으로 전화 회의 통역을 하거나 화상 회의를 통역할 수 있다.
에이젼시 3곳이 모두 다른 요율을 제시했고
재택근무치곤 꽤 수입이 괜찮아서 accept를 했고 on-boarding process를 진행했다.
그러나 절차가 너무 느린 이 사람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반만 따라가도 2주 만에 해결될 일을 한 달 반동안
사람 피를 말리면서 질질 끌다가...
이제서야 3곳 모두 플랫폼 승인이 한꺼번에 떨어져서
다음 주부터 3곳의 플랫폼 기반 의료 통역 및 법률 통역을 하게 되었다.
한꺼번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6월 13일의 금요일에서 14일 토요일이 넘어가는 새벽에 메일을 발송했다.
한 곳은 당장 새벽에 클라이언트 미팅을 요청을 해왔고
새벽 5시 ( 미국 시간 오후 3시)에 30분 브리프 한 미팅을 했다...
진짜 일을 하는구나
통역사 ID가 생기고
클라이언트와 데모 콜 승인을 하고 유의사항을 전달해 주는 회의를 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렇게 '어쩌다 다시 통역사'
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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