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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Mar 20. 2024

자격증, 우선 따보겠습니다.

무턱대고 자격증을 따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서다. 아이는 입시를 앞두고 이전보다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고등학교 입시 결과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는 내심 합격을 바라고 있었다. 엄마가 도울 방법으로 겨우 생각한 것은 공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아니 감시하는 것이었을지도. 아이의 밤 공부에 보조를 맞추려니 그 시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공부하는 아이 몰래 TV를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할 수는 없었다.

     

제일 그럴듯해 보이는 독서도 한두 시간이면 잠이 쏟아졌다. 마땅히 할 일도 없이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곤욕스러운 나머지 생각해 낸 것이 자격증 시험이었다. 아이에게 엄마도 뭔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속셈이었고, 덤으로 몇 년 뒤 쉬엄쉬엄할 수 있는 일거리를 마련해 보겠다는 생각도 있긴 했다. 모든 일의 시발이 아이와 연결되는 것이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아이는 다른 교과에서는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외국어만큼은 남달랐다. 그렇다고 영어유치원에서부터 두루 학원을 섭렵하며 다져진 아이들보다 월등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암기가 기본 학습 능력으로 평가되는 한국 교육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학생이었다. 처음으로 치르게 된 중간고사, 문제가 되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무엇인지, 영어 세 음절로 답하는 문제에서 교과서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외워서 쓰지 않아 오답 처리된 것이다. 다행히 나중에 답으로 인정되었지만, 암기를 토대로 학습하는 방법이 익숙하지 않아 고전했다.  

    

문법이나 표현법을 공식대로 외워서 하는 대신 생활에서 익혀진 ‘감’으로 하는 통에 누군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냥 이게 자연스러워, 보통 이렇게 말하지, 라며 문제를 풀어내는 모습이 사뭇 엄마를 불안하게 했지만, 주변 친구들과 다른, 잘 알아듣지 못하는 원어민 같은 발음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엄마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듣기에 근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서 그저 친구와 잘 지내기를 바라던 엄마의 마음은 한두 해 지나면서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으로 급선회했다. 당시 주변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입학한다는 소문에 귀가 팔랑거렸다. 주변 친구들보다 외국어는 크게 공들이지 않고 할 수 있으니 무모한 도전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는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 언어만이 상황에 맞게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함을 즐겼다. 엄마의 외국어 학교 진학을 향한 야망을 아이는 얼결에 수용했고 둘의 밤 공부는 시작되었다.  

   

이렇게 아주 애매한 마음과 약간의 결연한 마음으로 시작한 공인중개사 자격증 1차 시험,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여가 남아있었다. 마침 공공기관에서 개설한 강좌를 수강했는데 교실 안에 모인 중년의 수강생들은 모두가 열의에 차 있었다. 술집에 가든, 공연장에 가든, 고속도로 위에 있든 어디에서든 앞만 바라보고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본인만 빼고 세상은 항상 쉬지 않고 돌아가는 듯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전 수업만으로는 제대로 시험을 대비할 수 없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독학이 필수였다. 속사포로 수업을 진행해도 시험 전에 모든 범위를 끝내지는 못할 정도 시험은 임박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두 과목이지만 재미없는 낯선 용어가 툭툭 튀어나왔고 암기할 것들이 흘러넘쳤다.   

   

엄마와 아이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공부 친구가 되어 거실에 놓인 널따란 책상 양 끝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의 쪽잠을 깨워주고 간식을 나눠 먹었다. 어떤 날은 아이보다 더 늦게까지 불을 밝히며 공부에 열중했고, 먼저 잘게, 라며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못된 눈초리로 째려봤다. 왜 이 공부를 시작했더라, 너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시작한 것 같은데…. 아이의 입시 결과가 나올 즈음, 엄마의 시험일도 다가왔다.  

    

거센 바람으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 마구 날아오르는 날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험장 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왠지 수험생인 듯한 중년 남자의 정신없이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띄었다. 짠해졌다. 모두가 그토록 열심인 게 왠지 슬펐다. 시험 보기 좋은 날이 있겠냐만 바람 때문에 더 추워진 가을 날씨가 오랜만에 치르는 시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꽤 좋은 점수로 1차 시험을 통과했다. 1년 안에 2차 시험을 통과하면 자격이 주어지니 시간도 넉넉히 벌었다고 생각했다(착각이었다). 아이도 엄마의 바람대로 입시에 합격했다.  

   

2차 시험은 공부할 시간이 충분하다고는 하나 과목이 네 개로 늘어나고 정말로 낯선 단어의 대잔치, ‘부동산 공법’을 공부해야 한다. 게다가 1차 시험을 통과하고 나자 자격증 취득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조바심과 간절함이 더해졌다. 1차 때와는 다른 결심이 필요해 보였다. 아이에게 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라며 전시하려던 검은 의도는 점점 희미해지고, 진짜 어떻게든 기필코 반드시 합격하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이 생겼다.  

    

하루 5개 문제로 합격하자! 아침에 일어나면 신통한 앱을 열고 문제를 풀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 공부한 과목을 선택해서 가장 집중할 수 있는 화장실에 앉아 문제 풀이를 하는 것이 루틴이었다. 비교적 쉬운 과목은 5문제 모두 정답을 맞혔지만, ‘공법’같이 함정이 많고 외워 할 부분이 많은 과목은 바른 선지를 고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암기가 필요했다. 뒤돌아서면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기억력을 겨우 부여잡고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보고 또 봤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지의 잘못된 부분은 빨간 줄로 표시해서 바른 답을 알려주는 친절한 앱 덕분에 화장실 사용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아이는 가끔 화장실에서도 공부하는 엄마를 발견하고 엄지척을 날렸다.

“그래, 내 너 보라고 공부 시작했다가 이 꼴이다….”  

   

또다시 쓸쓸한 바람 부는 가을, 2차 시험이 다가왔다. 주말을 맞아 집에 있던 가족은 평소 공부하는 모습을 봐선 합격이 당연하다며 너스레를 떨어서 속을 뒤집어놓았다. 시험 직후 나온 정답을 보면서 가채점했다. 빌어먹을 공법! 몇몇 문항이 헛갈리는 바람에 제대로 답안표시를 하지 못해 아리송한 상황이었지만 그 문제들을 전부 틀렸다 해도 과락은 면할 정도였다. 과할 정도로 점수를 챙긴 나머지 과목 점수를 끌어다 평균을 내면 넉넉히 합격을 할 만한 점수 결과가 나왔다. 이로써 일 년여에 걸친 자격시험 공부의 막이 내렸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아이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이상한 동기에서 시작한 시험이 끝이 났다.


‘닥치고 자격증 공부’로 자격증을 손에 쥐었으나, 현장에 나가서 활동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눈앞에 써먹을 증서가 생겼지만, 중개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시험 합격의 기쁨도 잠시였다. 그저 책으로만 중개를 공부했으니, 실재의 경우를 물어오는 지인들에게 뾰족한 대답을 주지도 못했다. 사실 자격 취득 전부터 일에 대한 호감이나 흥미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나중에 해보겠다는 말로 주변과 자신을 기만하면서 여러 해가 지나갔다.




아직도 아이는 화장실에서도 공부했던 엄마를 떠올리면서 굉장한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책에 푹 빠진 채 길가를 걸어가고 있는 아이나 소란스럽고 복작대는 공간에서도 눈길을 떼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존경심 같은 것이란다. 자기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고 앞으로도 본인은 절대 도달하지 못할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그리고 무슨 일이든 결심하면 이룰 사람이라고 기묘한 칭찬도 덧붙였다.  

    

이즈음 삐사감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한 실체는 아직 없지만, 남은 시간 동안 돈을 좇지 않고 살아보려고 한다고, 처음으로 자기가 생각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속마음이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직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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