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K 동네도 가끔은 끈질기게 다그치는 엄마의 목소리와 한참을 참고 듣기만 했을 아이의 외마디가 들리곤 했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모자의 대화를 숨죽여 듣던 삐사감은 가슴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야간 자율이 끝나갈 시간, 이제 씻고 좀 쉬면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7층까지 울려 퍼지던 아이의 울부짖음과 조금은 낮아진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던 밤, 정말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즈음 지인의 소개로 강좌 이름도 거창한 '비폭력 대화' 연습 모임에 참가했다. 2017년, 삐사감의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주 찬란한 청춘이었지만, 부모(주로 삐사감)와의 모든 대화는 스쿼시 공처럼 끊임없이 벽을 튕기고 나오는 모양새였으며 한국과 중국의 긴 탁구 랠리처럼 박진감과 피곤이 공존했다.
긴 랠리를 자처한 쪽은 항상 삐사감이었다. 그는 집요하게 포기를 모르고 갈구는 타입으로 말로는 잘 지지 않았다. 아마도 ‘헬리콥터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칠고 독선적인 말과 아우라로 아이를 제압하려고 했을 것이다. 길가에서 소리를 높이던 모자의 모습에 뜨끔했을 것이다. 바로 그였으므로.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을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모임에 참가했을 리 없다.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책상에 붙어 앉아 공부하면서도 과제는 끝이 없었다. 불안감에 잠을 쫓아가며 건강에 무리를 줄 정도의 생활을 지속하던 아이에게 어떤 불만이 있었을까? 항상 나오는 말이 곱지 못하고 결과를 추궁했다. 아이보다 높은 목표를 멋대로 설정하고 그에 도달하지 못하면 분노에 가득 찬 말을 내뱉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일이 잦았다.
2년여 동안 비폭력 대화 연습 모임을 꾸준히 다니면서 얻은 것은?
처음에는 가족의 비아냥이었다. 지금까지의 말과 행동을 봐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힘든 목표라는 생각이었을까. 가족은 호시탐탐 자칼의 말(폭력적 언어)을 쏟아내는 순간을 포착하여 비폭력 대화에서 뭘 배운 것이냐고 공격했다. 연습 모임에서는 머리로 인식하고 최대한 조심해서 발언하기에 가능해 보이던 대화법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상당히 힘이 들고 오랜 시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비폭력 대화 연습 모임에서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대화하는 데 연습이 필요한 이유는 이미 우리는 잘못된 대화법에 길들어서 자칼의 언어만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신과 가족을 포함한 타인을 분리하는 일은 과제로 남았다. 자주 자칼의 말을 내뱉고 사과의 말에 인색하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타인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여전히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뼈아픈 진실이다.
낮고 작은 소리로 흐르는 음악을 배경으로 자리에 편안히 앉는다. 싱잉볼 소리에 맞추어 눈을 살포시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한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부위에 자신의 호흡을 집중시킨다. 연습 모임은 항상 이렇게 시작되었다. 자기 몸에 집중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흘려보내는, 조금은 정화되고 안정된 심신 상태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그곳에 자리 잡은 욕구를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것이 내 욕망임을 인지하면서도 타인이 대리하여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단계에서 항상 갈등이 발생했다는 사실도 저절로 인지되었다.
상대는 나의 분노에 책임이 없다.
분노는 우리의 이런 상태를 알려주는 경보기 역할을 한다.
비폭력대화법을 처음 시도한 마샬의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타인이 나의 화를 돋우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강한 욕구와 연결된 것으로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화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연습 모임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일은 흔했다. 내면의 고민을 토로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을까, 눈물은 수치스러움 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고 조금은 정화되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짱이다’는 자기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자신의 장점을 대충 적은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화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반성과 자책이 너무 무겁고 깊어지면서 자기 비하로 빠질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위로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닌 장점을 찾아 삶의 동력으로 삼자는, 미래를 살아갈 나에게 힘을 주기 위한 귀여운 활동이었다고 기억된다.
전쟁이 발발하고 상상하기 힘든 잔악함이 알려지면서 생존배낭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삶이 무상해졌다. 전쟁상황이 아니더라도 바깥은 지옥이라며 삶의 각박함을 호소하는 세상에 한낱 대화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지만, 그러니까 더 다정하게 둥글고 모나지 않은 말을 주고받아야 하지 않을까? 삶이 유한하므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아름다운 말이 서로의 뇌리에 남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