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도 있다니 다행이었다. 투투(발레리아가 입는 스커트)는 고사하고 분홍 발레슈즈도 신으려니 쑥스럽고 어색했기 때문이다. 2016년 1월 엄동설한에 발레를 시작했다. 발레가 자세교정에 좋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당시 무리 지어 다니던 동네 친구 대여섯이 한꺼번에 등록을 한 것이다. 분기당 3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강료에 주 2회나 수업이 있었다.
수업시작 전에 토슈즈를 준비해오라는 공지에 발레샾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발레용품가게는 처음 가보는 거라 구경만 하는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입지도 않을 레오타드와 샤랄라한 스커트의 화려함에 빠져 한참을 보다가 결국 발레슈즈를 하나씩 사들고 근처 칼국수집에 들렀다.
중년살의 원흉인 탄수화물을 맘껏 흡수했다. 누군가 레오타드 입기 전까지는 먹어도 된다고 하자, 그걸 입을 날이 오겠냐며 함께 웃어넘겼다. 다들 내 생에 발레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라는 듯 현실감각을 잃은 얼굴로 사골육수가 진한 칼국수와 겉절이 김치를 흡입했다. 흥분으로 커진 목소리로 가게 안이 떠들썩해졌다.
강사는 상상 속의 발레리나 그 자체였다. 무용으로 유명한 대학을 졸업했다는 그는 열정적이었다. 강좌명 <스트레칭 발레>에 맞게 수업은 곡소리가 나는 고난도 스트레칭으로 시작되었고 몸 찢기는 20여 분간 계속되었다. 니은(ㄴ) 모양(바닥에서 상체를 곧바로 세우로 앉은 상태로 다리를 곧게 앞으로 펴는 자세)으로 앉아 포인 앤 플렉스를 하는 것이 스트레칭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이었는데 여기부터 난관이었다. 우선 니은이 만들어지지 않는 데다가 ’ 포인 앤 플렉스‘을 하다 보면 발에 쥐가 나기 일쑤였다.
요가나 메트필라테스도 그렇지만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가장 어렵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니은의 꼭짓점 부분을 반듯하게 펴다 보면 허벅지, 종아리가 아파오고 허리가 굽거나 다리가 저절로 접히기 때문이다. 중년여성의 맘대로 편해진 몸을 상대로 강사는 땀을 흘려가며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자신의 몸으로 시연하면서도 막막해하는 듯했다.
이런 몸들이 드미 플리에(Demi Plié), 그랑 플리에(Grand Plié), 를르베(Relevé), 그랑바트망 롱드잠 아떼르(Ron de jambe à terre) 등에 도전하는데 단 3개월이 소요되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완벽한 동작은 없었다.
발레교실에서 웃음과 탄식은 하나의 세트였다. 강사의 동작에서 볼 수 있는 곧게 뻗는 몸선에 감탄하고 곧이어 그를 따라 하는 수강생의 탄식이 이어지는 것이다. 음악은 나오고 강사는 구령을 붙여 동작을 종용하지만 손과 발은 허공을 마구 휘젓는다. 헛웃음으로 지상에 착지한 손발이 안정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기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까 멋쩍어하는 눈빛이 오갔다. 이걸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날이 지배적이었지만, 아주 가끔은 다른 수강생처럼 레오타드를 장착하면 실력이 붙어 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발레 교실에도 고인물이 있었다. 몇 년간 발레를 하고 있다던 그는 강사보다도 더 발레리나의 몸을 지녔고 수강생 중 가장 젊었다. 가느다란 몸은 뼈에 얇은 살을 살짝 덮은 듯, 출렁이거나 불룩 튀어나온 살집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레오타드와 스커트 차림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래, 이 옷은 이런 사람이나 입어야지……
맘속에서 그런 생각이 올라왔다.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보수적이고 편협해서 중년아줌마의 노출을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사, 육아 노동이 만든 생활 근육을 울퉁불퉁, 흔들흔들, 중력을 이기지 못해 처진 살로만 보았다.
반년 간 빠짐없이 출석했다. 동작을 암기해서 오라는 강사의 요구에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복습도 했지만 동작이 어려워지고 추가되면 카오스에 빠졌다. 스트레칭을 위주로 하면서 조금만 천천히 동작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삐사감이 발레에서 멀어지는 순간에도 함께 시작한 지인은 발레복을 사 입고 누구보다도 땀 흘리면서 쩌릿쩌릿한 근육통을 즐겼다. 그는 아직까지도 발레를 하고 있으니 각자에게 맞는 운동이 분명 있는 듯하다.
발레를 배운다고 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 그리고 <Billy Elliot>. 하지만 발레교실에서 삐사감의 몸짓, 춤사위는 뭔가 뚝딱뚝딱 로봇 같았다. 그래도 열심이고 정성으로 가득한, 끝까지 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빌리 못지않았다고…. 말하고는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