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길을 잃어도 좋지만

by 이아인

피렌체에는 길이 많다. 오래된 도시다 보니 오래된 많은 길들이 있다. 발로 찾아드는 길만이 아니라 마음이 향하게 되는 길 역시 무수하다. 비가 내리면 붉은 지붕들이 꽃처럼 피어나 '꽃들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에는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 겨울 흙 속에서 분투하듯 오래 견딘, 꽃처럼 아름다운 성당과 수도원들도 즐비하다.

반경 몇 킬로미터 되지 않는 도심의 수많은 성당들은 지어진 시대의 애환과 기쁨 못지않게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의 신앙과 불화와 두려움까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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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943.JPG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창조한 곳도 피렌체였다.


특히 재물이 밀려들던 13세기에 피렌체에서는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긁던 부자상인들이 합법적으로 그 이득을 양성화하고, 예로부터 금해온 고리대금 업자라는 죄로부터 속죄할 기회를 얻었다. 수도원 성당에 평신도들의 시신을 안장할 수 있도록 교회법이 바뀐 덕분이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금지해온 고리대금으로 죄를 지어 내세에 대한 두려움에 떨던 상인들은 선조들을 수도원에 안장하고 그 대가로 수도원을 후원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자금세탁이었다. 또한 부자들은 자신의 토지 위에 교회를 지었는데, 토지(교회)에서 발생하는 수입은 소유자의 몫이 되었으므로 신자들의 헌금은 대대손손 그들의 주머니를 더욱 채워주었다.


IMG_6951.JPG 성스러운 어머니를 상기시키기도 하고


IMG_6945.JPG 또 다른 여인이 잠들어 있기도 하고...피렌체의 많은 길


피렌체의 성당에는 시기마다 호령하던 명문가들의 묘와 그들을 위한 가문 기도실이 있다. 예를 들어 산타크로체 성당에는 바르디 가문의 기도실이, 산타마리아 노벨라 수도원 성당에는 스트로치 가문의 기도실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기도실이야 두말할 필요 없었다. 산마르코 수도원에도 산로렌초 성당에도, 피렌체의 주인 메디치 가문을 위한 기도실들이 있었다.


IMG_6498.JPG 도미니코수도회 산타마리아 노벨라 수도원과 함께 양대 산맥이었던 프란치스코회 산타크로체 수도원


명문거족의 기도실을 품고 있던 성당과 수도원 자체가 중세 피렌체의 역사였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던 이들의 피와 음모와 배반과 책략과 성공과 실패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조상들을 안치해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 그들은 이제 부와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해 기도실을 꾸몄다. 당대의 뛰어난 화가들이 장식한 기도실들은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피렌체의 성당을 돌아보며 조토와 마사초,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프라 안젤리코 등의 작품을 향유하게 되었다.


IMG_6985.JPG 산타크로체 수도원에는 피렌체의 토착귀족 바르디 가문의 기도실이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그린 조토의 프레스코가 여기에도 있다.


애초에 반골 기질이 있었던 피렌체 사람들은 교황청과 불꽃 튀기는 경쟁과 견제를 이어갔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눈 밝은 존재들이었던 그들은 교황의 통치에 수동적으로 순응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판단했고 행동했다. 그들은 회의했고 반격했다. 그들은 교회의 천개 아래 머물렀지만 그보다 더 넓고 원초적인 세상도 꿈꾸었다. 동방교회와의 오래된 반목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피렌체 사람들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정복되자 동로마제국의 석학과 예술가들을 받아들인 것 역시 피렌체였다.


1439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서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1054년 이후 갈라져버린 동서방교회를 통합해보려는 시도였다.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통합을 지지했지만 동방교회의 격렬한 반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성취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IMG_6480.jpg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진 코시모 데 메디치 청동상


코시모 데 메디치라는 탁월한 인물로부터 뿌리를 내린 메디치가는 한 시대를 찬란하게 풍미했다. 그들의 성취는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 공과가 비단 피렌체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비극적인 얘기지만, 프랑스로 시집 가 그 참담한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자행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 또한 메디치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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