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의 자취

미스트라스 성당들

by 이아인

타이게토스 산자락에 들어선 미스트라스는 두 개의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상부도시 입구에서 내려 무너진 돌담길을 걸어 내려갔다. 저 아래 평원이 여름 한낮 태양 아래 푸르게 빛났다.


IMG_4454.JPG 미스트라스 상부도시로 들어서는 입구. 미스트라스는 198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스 고대국가들은 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에 신전을 세웠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린 언덕에는 성벽이 세워져 종교적 중심지이자 도시를 지키는 기능까지 해냈다. 미스트라스에도 '더 높은' 상부도시가 있지만 이곳의 핵심은 그리스 폴리스와는 달리 세속 영역인 영주의 궁이었다.



IMG_4464.JPG 미스트라스 상부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옛 미스트라스 풍경이 그려져 있다.


데스포티스(Despotis)라고 불린 통치자는 애초에 라틴제국의 모레아 왕국에 반격을 가해 미스트라스를 되찾은 미하일 팔라이올로고스 황제의 가족들이었다. 1348년 미스트라스가 모레아 공국의 수도가 된 후 제국의 강력한 도시로 발전하는 가운데 영주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들은 막강한 부와 정치력으로 도시를 더욱 아름답고 내실 있게 발전시켰다. 당대의 건축가와 예술가들도 미스트라스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많은 수도원과 성당을 짓고 성스러운 세계를 구현해냈다.



IMG_4520.JPG 복원 중인 데스포티스의 궁전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숨결은 꺼져가고 있었다. 이미 이 시기에도 거대한 제국은 지탱이 위태로웠다. 미스트라스는 그 마지막 불꽃이 피어나던 현장이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표현처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직전, 펠로폰네소스의 한구석에서 영원한 그리스의 정신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에 저기 어디쯤에 있었을 학교에서 사람들은 플라톤을 배웠다. 그사람,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학교였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원리는 플라톤의 제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였다. 이에 반해 플레톤은 플라톤의 보다 신비적이고 직관적이며 비가시적인 철학을 피력했다. 낯설지만 새로운 주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매혹되었다.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439년 플레톤은 동방교회의 일원으로 피렌체공의회에 참여했다. 그때 코시모는 그에게 플라톤을 듣고 아예 플라톤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씨앗이 미스트라스로부터 발아했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 될까.

플레톤은 어떻게든 기울어가는 제국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스파르타의 기개로, 플라톤의 희망으로, 어떻게든 나라를 다시 살리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의 사자후는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제국이 오스만 이교도에 의해 멸망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IMG_4471.JPG 무너진 돌담과 아치문들을 통해 길은 성당과 수도원으로 이어진다.


무너진 채 세월을 견디고 서 있는 돌담과 아치 문들을 지나 궁전 부속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에 들어섰다. 텅 빈 성당에 비잔티움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가 하늘 높이 좌정하고 계셨다. '우주 만물의 통치자'는 비잔티움의 번잡하고 분주하던 성당에서 그랬듯이 어떤 자취도 남지 않은 채 오래 방치된 공간에서도 여전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잠시 낮은 아치를 통해 성당을 둘러보고는 다만 그 여백만을 마음에 담고 현실로 돌아갈 때 남아있는 것은 거룩함을 표상하는 존재들이었다. 오래 바라보아야 말을 걸어오는 존재들이 소피아 성당의 침묵 속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라는 프레스코화 속에서도 그 보이지 않는 존재의 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IMG_4477.JPG 판토크라토르는 세상 만물을 통치하는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IMG_4494.JPG 소피아 성당의 문에서 어떤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니콜라스 성당 역시 왕실 교회였다. 이 성당의 상황은 더 아득했다. 바닥까지 사납게 패어버린 성당은 말 그대로 황성옛터였다. 성당 앞마당에서는 멀리 스파르타까지 이어지는 평원을 뒤로 하고 복원중인 데스포티스의 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데스포티스는 비잔티움 시대에 황제 다음 가는 권력자였던 영주였다. 미스트라스라는 도시 역시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제국의 두번째 도시로 번성하기도 했다.



IMG_4560.JPG 완벽하게 텅 비어 있는 니콜라스 교회. 돌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의 잔영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남아 있는 많은 그리스 단어들이 뭔가를 말하는 것도 같다.


뜨거운 햇살과 푸른 길. 과거와 현재를 흐르는 물길처럼 오솔길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길을 걸었다. 모넴바시아 문 앞에 이르렀다. 미스트라스 상하부 도시를 넘나드는 경계로 해발 300미터 정도에 자리한 이 문을 지나자 미스트라스의 하부 도시가 이어졌다.



IMG_4572.JPG 해발 300미터쯤에 있는 모넴바시아 문이 미스트라스의 상하부 도시의 경계다.


가장 영화로운 시기였던 모레아 공국 시절 우후죽순 들어섰던 건물들이 이젠 이름도 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페리블렙토스 수도원과 브론토키온 수도원, 미트로폴리스의 디미트리오스 성당과 지금도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판타나사 수녀원 등은 비잔티움 제국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IMG_4578.JPG 미스트라스 하부도시에 있는 브론토키온 수도원은 비잔티움 제국을 되살리고자 분투한 플레톤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다.


묘지에 많이 심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곳곳에 푸르고 성당도 곳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판타나사 수도원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홀연히 솟아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문을 지나 지엄한 공간에 들어섰다. 수녀원의 작은 앞마당은 아기자기했다. 크고 작은 암포라에는 푸른 식물과 앙증맞은 화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모든 이의 여왕'이라는 뜻의 판타나사(Pantanassa)는 동방교회에서 성모마리아를 부르는 칭호 가운데 하나로 이 수녀원도 성모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IMG_4591.JPG 미스트라스의 많은 수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수도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판타나사 수녀원 앞마당.


본당은 섬세한 십자가와 정교한 꽃잎 문양 주두를 가진 기둥들이 인상적이었다. 어둡고 깊었다. 어느 정도 예감은 했지만 역시 너무나 손상된 프레스코화들이 편치 않았다. 나르텍스의 아치문에 그려진 사도들의 프레스코화 역시 벗겨지고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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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성 같은 수녀원 회랑으로 나가 기둥 아래 잠시 서성이다 아래를 보니 얼굴만 내놓은 검은 수도복의 할머니 수녀님이 지나가고 계셨다. 문득 위를 올려다본 수녀님의 쪼글쪼글한 눈이 최대한 크게 웃어보였다. 무척이나 명랑한 느낌이었던 것은 햇빛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수녀원의 대기는 한껏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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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열렬히 주님을 불러라. 성당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노동과 식사 중에, 그리고 너의 잠자리 위에서 중단 없이 이것을 하여라. 한마디로 눈을 떠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렇게 하여라.”


정교인들은 끊임없이 예수기도를 드린다. 그들에게 예수기도는 그 자체로 신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적인 세계의 태양인 그리스도의 빛 안에 머무는 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세계에 머무는 것이다. 수녀님은 필시 끝없는 예수기도 가운데 그토록 환한 미소를 내게 보내셨을 거다. 그 빛 속에서 막 나오신 게 분명해보였다.


수녀원을 나와 미트로폴리스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참 좋았다. 길가 나무그늘 아래 한 여행자가 고즈넉이 앉아 쉬고 있어서 더더욱 발길을 잡는 길이었다.


미트로폴리스의 디미트리오스 성당에는 미스트라스의 마지막 한순간이 간직되어 있다. 성당 바닥에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바로 그곳에서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대관식을 하고 미스트라스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하얀 대리석에 새겨진 비잔티움의 상징이 처연했다.



IMG_4704.JPG 미스트라스에서 가장 초기에 세워진 디미트리오스 성당에는 역설적으로 제국의 마지막 순간이 새겨져 있다.


제국 말기였다.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의 형 요한네스 8세는 제국의 위태로운 처지를 알고 있었다. 서방교회도 좋지 않은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백년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기진맥진해졌고,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완결짓는 시기였다. 마음을 모은다 해도 그 옛날 십자군과 같은 출정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황제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만나 동서방 교회의 통합을 고민했다. 이를 위해 1439년 피렌체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공의회는 이를 지지했다. 문제는 동방교회 내부의 어마어마한 반대였다. 나라는 풍전등화였는데 서방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용서와 화해 따위는 지워버렸다. 그들에게는 서방교회가 세상 무엇보다 더 끔찍한 적이었다. 결국 황제의 가련한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십여 년 후 비잔티움의 호흡은 끊어졌다.


그때 극렬하게 교회 통합을 반대했던 옌나디오스 주교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종교가 더럽혀진다면 차라리 종교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문이 열릴 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로부터 470년 동안 정교회는 밀레트 제도 등으로 관용을 베푼 오스만 제국에서 별 문제 없이 종교적 활동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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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라스를 떠나며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미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늙고 병든 제국을 등에 짊어진 황제는 자신의 잔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탄원했던 것처럼 홀로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또한 예수처럼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라고 응답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미스트라스를 떠났고 이 마지막 황제 덕분에 천 년 제국의 마지막은 그나마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토록 비잔티움 제국을 폄하하던 이들도 황제의 퇴장 앞에서 비로소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IMG_4707.JPG 미트로폴리스 디미트리오스 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


IMG_4720.JPG 모레아 공국을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난 형의 뒤를 이어 비잔티움 제국 황제에 등극했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대관식을 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미스트라스는 빛으로 가득했다. 여름 낮에 찾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빛 속의 미스트라스가 아닌 안개속 도시를 보고 싶었다. 북풍이 사나운 한겨울, 어떤 준엄한 명령을 내리기라도 하듯 냉엄한 표정인 도시를 걷고 싶었다. 저기 어디쯤 안개속에서 파우스트가 헬레네를 만났다는 곳 아니던가!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존귀한 머리에 피할 수 없는 섭리의 관이 씌어졌던 곳! 운명적인 재앙에 소스라치고 남은 미련 속에 오랫동안 사무쳤던 곳! 그 운명의 한복판 같은 안개를 헤치고 타이게토스 산자락 꼭대기에 오르고 싶다.



IMG_4793.JPG 팔라이올로고스 마을 복판에 세워진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상


'팔라이올로고스 마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미스트라스를 떠나왔다. 정지된 햇빛의 땅, 불임의 열매가 영글고 꽃들이 작열했다. 오래된 이름을 기억하는 마을, 아주 소박하고 고요한 길에 사람들이 오갔다. 세상의 어떤 곳, 여기까지 오다니. 아득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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