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사라진 옛 제국의 그림자
1054년 그리스도교회가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옮겨 새로운 관구가 된 콘스탄티노플이, 몇백 년 동안 쌓인 복잡하고도 어려운 여러 문제들로 점점 멀어지다가 기어이 갈라지고 말았다.
그 후 종종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모든 노력에 쐐기를 박아버린 사건이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었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할 병력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 참혹한 폭력을 행사했다. 돈 때문이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때 '갈라진 형제'들의 잔인한 행위에 치를 떤 정교인들은 그날의 폭력이 이교도인 무슬림보다 더 끔찍했다고 전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십자군은 '라틴제국'을 세우고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그리스 전 지역을 몇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인 모레아(Morea)는 프랑크 제후 기욤2세 빌라르두앵의 땅이 되었다. 그는 1246년 미스트라스에 성채를 건설하기도 했지만 1259년 반격에 나선 비잔티움의 니케아 제국 미하일 팔라이올로구스 8세에게 포로가 되어 미스트라스의 빌라르두앵 성채와 모넴바시아를 몸값으로 지불해야 했다. 미하일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는 가족을 보내 미스트라스를 통치했다.
라틴인들은 1261년 니케아제국에게 완전히 밀려났다. 제국은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에 의해 재건되었지만 이 시기에 쪼개져 약화된 국력은 더 이상 온전히 회복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200년이 지난 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천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미스트라스는 1687년부터 1715년까지 짧은 베네치아 통치를 거쳐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다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도시는 거의 초토화 되어 재건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1830년경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스파르타가 복구되기 시작하자 주민 대부분이 그리로 옮겨가 지금은 800여 주민이 살아가는 소읍이 되었다.
십자군이 원래의 목적대로 성지 탈환에만 집중했더라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 폭력을 자행하고 라틴제국을 세우는 일이 없었더라면, 그 후에라도 동방과 서방이 회개하여 일치를 이뤘더라면, 양쪽 모두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그래도 하나였던 기억을 찾아 힘을 모았더라면.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역사의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해보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함락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이슬람의 지형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슬람에 대한 오해도 안타깝고, 극렬한 테러리스트가 되어 버린 가짜 무슬림들의 폭력이 공포스러워 물거품 같은 생각에 빠져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도시였다. 서방의 프랑크족들이 비잔티움의 심장을 약탈하고 쪼개 가진 씁쓸한 시작이었다. 그들도 떠나고 비잔티움 제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 미스트라스가 들어선 타이게토스 산자락 꼭대기에는 빌라르두앵이 구축했던 성채만이 모레아의 왕관처럼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