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그리스
그리스라는 나라는 그들의 옛 신들처럼 열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열두 개의 강이 겹쳐 흐르고 열두 개의 하늘에 해가 뜨고 별이 숨었다. 그리스의 다층적 세계에 들어선다는 건 좀 막막한 일이었다.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열두 개의 길 앞에서, 들어설 수 없는 길들을 생각하느라 마음만 분주하고 가지 못할 길을 미리 접느라 마음이 이미 저렸다.
서유럽에 갈 때는 그리스도교의 천개 아래 집중하면 대강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도대체 그럴 수가 없다. 수천 년 전 그리스 신화로부터 오늘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비극들까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사도 바오로가 사자후를 내지르던 아레오파고스의 자취까지. 거기에 가히 천 년 제국이었던 비잔티움과 숙적 터키인들이 주축이 된 오스만 제국의 오백 년 통치. 어디에 시선을 두고 다녀야 할까.
겹겹이 쌓인 지층만큼 그리스는 물음으로 가득찬 땅이다. 곳곳에 스핑크스가 버티고 앉아 가장 먼저 나 자신에 대해 묻는 곳. 그리고는 땅과 하늘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존재와 의무에 대해 묻고 답을 찾도록 촉구하는 곳. 신화가 묻고 비극이 묻고 철학이 묻고 사도 바오로의 '기쁜 소식'이 묻는다. 비잔티움의 뒤안길이, 오스만제국의 착취 속에 살아온 피지배의 기억이 곳곳에 도사리고 섰다. 무수한 질문들 속에서 도리어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그리스에서, 나도 뭔가를 묻고 답을 얻어야겠다. 신들에게든 영웅에게든 철학자들에게든 물어야 할 필수항목들을 찾아봐야겠다.
무엇보다 그리스 신화와 철학 없이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교부들이 나올 수 없었고, 그 동방의 교부들 덕분에 이 종교는 섬세하게 길을 닦아올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혼돈의 물줄기에 놓인 단단하고 널찍한 징검다리였다. 이제 2천 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그 아득한 시간이 그리스로 향한다. 그 징검다리를 오늘 내가 건넌다.
그리스를 찾아가는 일은 오디세이처럼 탐험에 나서는 것과도 같다. 무엇을 위해 나서는 것인가, 무엇을 찾을 것인가. 그리하여 오디세이가 그랬듯이 나의 여정에도 따뜻한 기원이 필요했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이타카>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바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