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은 고요히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은 차가웠다. 좀 당황했다. '열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보랏빛 얼음호수 위를 구르는 구슬 같은, 비애에 젖은 구슬 같은 음들이 떠다녔다. 물음이 터져나왔다. 열정은 어디에 있는 거지?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뜨거움은 더 차갑게 응결된다는 걸. 마침내 열정적인 멜로디가 터져나오자 이내 그 뜨거움에 베이는 것 같았다.
'고요한 순례'라고 했다. 하지만 고요는 정적이지 않다. 고요는 잠들지 않는다. 들끓지 않고는 온전히 순례일 수 없다. 열정이 없는 고요한 순례란 가능하지 않다. 갈망과 호기심과 기다림들이 뜨겁게 뒤섞인다. 놓쳐선 안 될 것들을 붙드느라 더더욱 뜨겁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윤동주 시인이 별을 헤며 소환한 여러 단어와 여러 그리움처럼 별을 헤며 불러보는 것들이 있다.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어쩌자고 다들 멀리도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그리움의 대상이라면 좋으련만 내 안의 동경은, 내 안의 쓸쓸함은 온통 떠나야만 만나게 되는 세계다. 그 세계, 여전히 동경으로 미혹하는 그 낯설지만 그리운 세계를 향해 꽤 오래 패키지 순례를 좇아다녔다.
언젠가부터는 같이 참여해 일정을 조율하며 다녔지만 그래도 여전히 갈망이 커지는 여정이었다. 떠나기 전엔 설렘과 호기심으로 무수히 책을 들여다보고, 돌아와서는 내내 다 못한 일들 때문에 또 병을 앓곤 했다. 닿을 수 없는 욕구와 현실의 틈에서 때론 충일하고 때론 결핍을 확인하며 들끓었다. 그럼에도 그 여정의 순간순간이 내 생을 밝혀주었다.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마음에 새기며 다시 길을 나선다.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순례 여정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