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비잔티움 제국의 자취
그리스라는 나라의 무수한 층위 어디쯤 아련하게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언젠가부터 서구에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동로마제국이다. 위대했으나 가련하게 명멸한 동로마제국. 광휘가 찬란했던 만큼 그림자도 깊은 그 슬픔의 늪에서는 여전히 종소리가 들린다. 낯설어서 더 찬연한 슬픔으로 들려오는 낯선 종소리가 자꾸 잡아당긴다. 알 수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게 한다.
미스트라스를 아세요?
오래된 도시에서는 기억 저편의 잊힌 이름 한둘쯤 떠오르게 되지만 미스트라스에서는 그 목록이 조금 길어질 것도 같다. 아예 몰랐던 이름들까지 새로 만나게 되니 더 그렇다. 모레아라는 지명 역시 몰랐던 이름이었다. 중세에 이 반도를 차지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그리스 본토 남쪽에 자리한 이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뽕나무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뽕나무(모레아)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갔던 코린토와 아가멤논의 나라 미케네, 그리고 그 오래된 도시국가 스파르타 등이 바로 이 땅에서 흥망성쇠를 겪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모레아 기행>에서 "그리스 속으로의 여행은 언제나 오래된 어머니인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쓴 바로 그 땅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 땅은 그리스의 뿌리, '기아에 굶주리고 피에 물든 뿌리'였다. 그리고 "그 뿌리의 최상부인 개화, 다시 말해 아테네는 그 뒤에 왔다."고 카잔자키스는 덧붙였다.
지중해의 겨울바람(미스트랄)이 연상되기도 하고,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 이름의 미스트라스는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그리스 민족의 시나이산'이라고 부른 타이게토스 산맥 자락 경사지에 들어선 도시였다. 그들의 운명은 곧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미스트라스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몇 해를 좀 들여다봐야 한다.
1448년 동로마제국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세상을 떠났다. 마땅한 후계가 없자, 1443년부터 모레아를 통치하고 있던 동생이 이듬해 미스트라스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투르크, 이교도들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1453년이었다. 미스트라스는 그로부터 7년 후인 1460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동로마제국 최후의 도시로 역사에 남아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세계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한 장면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한 이후 천 년을 이어온 동쪽의 로마제국, 그리스도교의 종주국이 이슬람 세력에게 장악되고 만 이날을 중세의 종말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이때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2세는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물론이고 이 도시의 그 누구도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없소. 우리는 모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것이고 자유롭게 죽을 것이오."
중과부적이었다. 그럼에도 '로마인의 기상으로' 그들은 응전했다. 최후의 날 황제의 의복까지 다 벗어던지고 적진에 뛰어든 그는 결국 죽었(을 것이)다. 어떤 표지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시신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참담한 이교도의 지배하에 수백 년을 살아가던 그리스 사람들에게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끝나고 마침내 그리스가 해방되는 날 황제는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전설을 들으며 자랐다.
이미 신화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나 자란 그리스에게 비잔티움 제국, 동방교회는 고향의 뒷산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여전히 비잔티움의 빛 가운데 살아간다. 그 제국의 마지막 자취가 남아 있는 미스트라스이기에 그리스인들에게는 심상치 않은 곳이다.
눈이 부신 여름 한복판, 저만치 타이게토스 산자락이 준엄하게 펼쳐진 미스트라스에 들어섰다. 작은 마을을 통과해 미스트라스로 들어가는 산길을 올랐다. 마을 한복판에는 콘스탄티누스 11세 조각상이 서 있었다. 산 전체가 도시였던 모레아 공국의 기억 속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