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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09. 2023

다시 고흐

_레보드프로방스


레보에는 저문 것들이 있다. 라벤더는 아마도 1주일 전까지 피어있었을 것이다. 꼭대기 레보 성터에는 져버린 라벤더가 무성하고 이제 쓰지 않는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스산하다. 가을이었다. 성채에서는 행사가 이어지는데 이때는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제목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아 고흐는 프로방스를 사랑했지. 프로방스의 시간도 고흐를 안아줬지. 기대와는 달랐을지라도 고흐는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가? 내가 물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또 슬퍼진다. 그의 일렁이는 나무들과 별빛 속에 내가 일렁인다. 내 존재가 내 슬픔이 덩달아 일렁여서 춤을 춘다. 덩달아 흔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은 순간 우리는 기쁘게 눈물 흘릴 수 있다. 그런 순간이 고흐의 그림에서 가능하다는 건 좋아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까. 

당신을 좋아할 때 가슴이 늘 평온하지 않았다. 늘 콩닥콩닥 평온하지 않았다. 당신의 손을 잡으면 언제든 평온하지 않았다. 너무나 새삼스럽게 새삼스럽게도 나는 감사 기도를 드렸다. 내가 너무 새삼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일상적이 못 되는 게 또 슬픔의 이유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 이미 다 지고 있는 라벤더 속에서, 남아 있는 향기만으로도 취해버리는 순간, 또 외로운 것이다. 누구도 감흥이 없는 고적 속에 혼자서 고마워하고 혼자서 취해가며 나는 또 혼자서 울음을 삼켰다. 이럴 때는 시를 써야 하는 것 같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순간은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시가 그렇게 고립된 문학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니까, 좀 봐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태 시를 못 쓰고 있으니 그래서 더 외로워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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