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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11. 2023

죽음의 공간 혹은 영원한 안식처

_레보드프로방스


블레이세 성당 맞은편에 있는 묘지로 들어갔다. 묘지는 ‘지옥의 계곡’ 위에 조성돼 있다. 

묘지를 들어서는 게 취미 아닌 취미, 아니 좋아하는 일이지만 거기서 이름을 들어본 누군가의 묘지를 만난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게 있으랴 싶기는 하다. 그래도 쉬아레즈가 거기 묻혀 있다는 건 조금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건 순전히 루오의 《미제레레》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제레레》의 서문을 원래 그가 쓰려던 거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의 글을 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루오와  《미제레레》 생각에 그의 묘지가 왠지 반가웠다. 쉬아레스는 그 전에 세상을 떠나 루오 자신이 쓴 서문을 읽는 행운이 우리에게 남겨졌지만 쉬아레스의 서문은 어땠을까 살짝 아쉽기도 하다. 루오는 그의 초상을 그렸다. 그는 쉬아레스를  《미제레레》에 등장하는 한 사람처럼 그렸다. 한눈에도 루오 친구란 걸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내게 루오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그를 잘 모르면서 왜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되는 걸까. 분명히 나는 자꾸 루오를 아는 척한다. 아주 부분적으로, 아주 티끌만큼 그를 알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 정신사적으로 표현하자면, 루오는 세상 물정에 밝고 겉모습이 화려한 바로크 그리스도교에서 갱생하여 잔혹할 정도로 진지한 ‘지하 납골당 그리스도교’로 되돌아갔다.”는 발터 니그의 표현에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바로 그 ‘지하 납골당 그리스도교’ 말이다. 아마도 나 자신 역시, 내 영혼의 골방 풍경 역시,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미제레레》의 한 그림은 ‘모든 사물에는 눈물이 있다’(sunt lacrymae rerum, 27)고 말한다. 세상만사가 눈물이구나. 덧없는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루오는 세상만사에 가득한 눈물을 보았다. 가장 낮은 곳, 가장 비천한 사람들의 눈물, 창녀와 어릿광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 비참에서도 그는 빛의 가능성, 구원의 가능성, 아니 너무도 마땅하게 존재하는 구원을 보았고 바랐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 눈물이 목까지 차 있는데 울지도 못하는 사람, 세상에는 눈물이, 그러니까 슬픔이 가득차 있다.     


     



레보의 성채 아래, 알필 산맥 자락이 발아래 펼쳐진 묘지는 참 안온했다. 세상만사 모든 눈물과 관계없어 보이는 레보의 아늑한 묘지. 여기에 루오의 친구가 잠들어 있다. 루오의 친구가 묻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울 만큼 그 순간 내가 쓸쓸했던 걸까. 모르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묘지 사이를 걸었다. 쉬아레즈는 ‘거슬리는 모든 것과 완벽하게 분리시켜주는 경탄할 장소’라고 레보를 예찬하면서 “아무것도 침묵과 고요한 평화를 방해할 수 없는” 묘지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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