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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09. 2023

레보드프로방스


레보드프로방스는 낯익은 이름이 아니었다. 다만 릴케의 여행기를 살짝 보기는 했다. 다정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프로방스 마을들을 지나다가 문득 암석이 가파른 계곡이 나타나고 척박해 뵈는 지형이 드러났다. 그리고 언덕 위에 뭔가 마을의 자취가 드러났다. 레보드프로방스였다.


레보드프로방스라는 이름에는 이미 석양이 드리워져 있다. 이제 이 마을에는 그 시간을 이어받은 현재가 없다. 마을은 관광지, 아름답고 애조띤 관광지다. 여기 살았던 주민들은 모두 떠났다. 이렇게 완벽한 떠남의 흔적에 유랑의 바람이 분다. 완벽하게 비어 있는 성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옛 모습을 상상해놓은 그림을 봐야만 겨우 그려지는 성채 곳곳의 쓸모.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를은 15킬로미터, 아비뇽은 25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 그러니 프로방스의 모든 바람이 달려와 뒤엉킨다. 마르세유에서도 그랬다. 지중해의 바람이, 카마르그의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생트마리드라메르에서 불어오는 전설 같은 바람이.




오늘날의 프로방스 일대를 모두 소유했던 레보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가운데 발타사르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뭔가 신비로워 보이기는 했다. 지금도 그들의 문장에는 열여섯 개의 별이 상징으로 쓰이는데 레보 마을에도 그들의 깃발이 펄럭였다.


전설에 따르면 베들레헴으로 동방박사를 인도했던 별이 발타사르를 레보로 이끌었다고 한다. 아마도 당대에는 어떻게든 거룩한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각 도시의 왕들이 어떻게든 제우스의 혈육이었던 것처럼. 권위를 위한 스토리텔링이라고나 할까. 프로방스의 곳곳도 성인들과 관련한 이야기들로 마을을 알려 왔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 등을 기억하는 생트마리드라메르와 타라스콩과 생막시맹라생트봄처럼.


레보드프로방스가 번성하던 당시는 트루바두르의 시대이기도 했다. 부유한 레보의 주인들은 트루바두르를 마음껏 지원했다. 프랑스 왕실은 풍요로운 남쪽을 끊임없이 욕심냈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프로방스였다. 레보드프로방스가 위그노의 거점이자 은신처가 되자 절멸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뤘지만 또 한 번 위그노 반군이 피신해 들어와 저항하는 바람에 아예 마을 자체가 파괴되고 말았다.

사라진 이야기들, 사라진 사람들의 뒤안길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근처 버려진 채석장에 ‘빛의 채석장 Carrières de Lumières’을 열고, 유명 셰프가 매혹의 식당을 열어 오랫동안 인적이 드물었던 레보에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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