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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13. 2023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 유수. 아비뇽 유폐. 어떤 방향에서든 유쾌할 수 없는 역사의 한순간이 있었다.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여파는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 아닐까. 당시 그리스도교의 힘 역시 지금 우리는 오롯이 느끼기 어렵다. 많은 것이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필리프4세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보니파시오8세를 별로 안 좋아했을 수도 있다. 인간적으로 말이다. 첼레스티노5세를 지지했는데 그를 강제로 퇴위시켜 반감이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건 미처 알 수가 없다. 다만 ‘아비뇽 유수’의 대략적인 정황은 세계사를 통해 다들 알고 있다. 

왕권 강화를 도모하던 프랑스 왕들에게는 전쟁을 통한 힘의 확대가 필요했고, 전쟁을 뒷받침할 군비도 절실했다. 필리프4세는 프랑스 안의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권이 약화됐다고 해도 교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수는 없었다. 보니파시오8세는 교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를 발표해 명백하게 필리프4세를 반대했다. 


할아버지 루이9세를 시성하면서까지 타협을 시도하던 교황이었다. 하지만 필리프4세는 교황권 찬탈과 성직매매 등의 죄목으로 교황을 고발하고, 고향 아나니를 찾은 보니파시오8세를 체포해 수모를 주었다. 교황은 뺨을 맞기도 했다. 아나니 시민들이 이 노인 교황을 끔찍한 위기에서 구했지만 한 달 뒤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니콜로 보카시니 추기경이 후임 교황으로 선출돼 8개월 만에 선종한 후 필리프4세는 거칠 게 없었다. 프랑스인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하고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자리잡도록 했다. 


사실 아비뇽에 머문 건 프랑스 왕의 강요라기보다 로마 상황에 대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로마는 교황파와 반교황파가  극심하게 갈려 있었다.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된 이후에는 내분이 더 심화돼 거의 무정부상태라고 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래저래 교황들이 잠시 거리를 두면서 전환점을 구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비뇽은 그 자체로 불의하고 부도덕하고 타락했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초래된 역사로 인해 더욱 부정적인 이미지가 됐다. 아비뇽 교황 시대가 끝난 후에도 혼돈은 정리되지 못했다. 또다시 대립교황이 대두됐고 공의회 우위설이 불거지며 교황권은 더욱 추락했다. 

약 70년, 일곱 교황이 여기서 교회를 이끌었다. 



그곳은 미로다. 비밀스러운 계단들.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거기 있었다. 모든 비밀은 봉인되고 여행자에게 허용된 적절한 공간들. 그 정도만을 ‘투어’할 수 있다. 교황들이 떠난 지 650년이 되어간다. 그 후로 영주의 거주지가 되기도 하고 군대의 병영으로 쓰이기도 하다가 19세기에 나폴레옹 3세가 복원을 시작했다.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탄원하고 비판한 저 사람,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가 저렇게 쪼끄맣게 붙어 있다.



일곱 교황. 몇 번의 시도. 몇 번의 실패. 교황들의 자취, 잘잘못, 공과는 기록에 처절하게 남는다. 하지만 교황 뒤에서, 교황의 주변에서 아비뇽을 소돔과 고모라로 만든 자들은 고이 잠들어 있을까. 교황을 겁박하고 능욕하고 조종하려 했던 프랑스 추기경들. 그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단테의 저주가 그들에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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