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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12. 2023

론강 너머 생탕드레 요새

_아비뇽



아비뇽을 여행하는 건,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뿌리를 탐험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굵고 어둡고 갈래갈래 수많은 길들이 미로처럼 나 있는 뿌리에는 자양분도 깊다. 아비뇽 교황 시대 역시 가톨릭교회의 역사다. 여기에도 영원을 향한 처절한 갈망이 있었다. 그 뿌리의 어디쯤에서는 걸려 넘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뿌리는 교회를 지탱해왔다.  



왜 아비뇽이었을까? 아를이나 마르세유와 달리 고대 로마 제국 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이 도시는 순전히 교황들로 인해 유명해졌다. 교황들이 자리잡으니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론 강도 특수를 누렸다. 세상의 중심인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었으니 이 도시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에서는 그때가 좋았다고도 했다. 아마도 보통사람들에게는 ‘교황님’이 계시던 때가 정말 좋았을 것도 같다. 먹고 사는 일도 당연히 좋았을 것이다. ‘아비뇽 유수’라는 사건의 의미를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더 살만한 때 아니었을까.     

지금 아비뇽에 가면 교황들의 자취, 그 70년의 자취를 만난다. 비어 있는 교황궁과 교황들의 노트르담 데 동 성당, 그리고 아비뇽에는 생베네제 다리가 있다. 옛날엔 그 다리를 건너 빌레브레자비뇽 마을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길을 따라 들어서는 고적한 마을이다. 


기슭을 따라 성채로 올라갔다. 이른 아침 햇살에 올리브 잎이 반짝였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긴 그림자를 따라 요새 쪽으로 걸었다. 


    




아비뇽에 교황들을 눌러 앉힌 필리프4세가 마을을 만들고 빌레브생탕드레Villenvue Saint Andre라고 불렀다. 그는 론 강 너머 교황의 도시 아비뇽을 감시하기 위해 안다온 산 정상에 요새를 세웠다. 아비뇽 시대에 교황과 추기경들은 그 주변에 여러 수도원과 교회를 지었다. 인노첸시오6세가 추기경 시절 살았던 땅을 기증해 지은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1377년 공식적으로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하고, 1480년 프로방스가 프랑스의 일부가 된 후 마을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더 이상 화려하지 않다. 이미 수백 년 전에 화양연화는 스쳐 지나갔다. 성당의 프레스코는 빛바랜 채 보수되지 않고 론 강의 다리는 끊긴 채 다시는 이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홍수 때문에 다리 아치가 무너져 수리했지만 더는 공사가 재개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강 중간의 섬까지 가서 계단을 통해 생베네제에 올라 아비뇽으로 건너갔다. 지금이야 길이 나 있으니 끊어진 다리는 묘한 상념을 일으키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 




생탕드레 요새에서 건너다본 아비뇽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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